Rexism : 렉시즘

노무현. 본문

생각하고뭐라칸다/일기에가까운이야기

노무현.

trex 2009. 5. 24. 01:00
원체험이 있다. 라디오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박정희의 서거 소식에 어머니는 눈물을 펑펑 흘리셨고, 나는 그걸 걱정하며 무슨 일일까 엎드려서 바라보던 기억. 이 흐릿한 기억은 지금도 간혹 상기하는 것인데, 국가 원수의 죽음이 개개인에게 공포와 아득한 미래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 그게 바로 내 가족의 일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인 것이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혈연 관계들의 집엔 언제나 [조선일보]의 거실과 [월간조선], [신동아]의 서재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게 TK 안에서의 익숙함이었고, 일상이었다. 나는 국민(초등 아님)학교 6학년 때 노태우의 일생을 다룬 홍보만화를 읽은 경험과 1번이라는 번호 때문에 심적 지지를 일기장에 적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익숙함을 실천하였다. 일기장 하단엔 서투른 그림체로 노태우의 인자한(!) 표정을 그려냈다.

그러던 나는 이후 현역병으로서 부재자 투표로 김대중에게 표를 행사했고, '내 손으로 대통령 만드는 재미'를 인식하였고, 수년 뒤엔 노무현에 대한 흐릿한 심적 호감과 지지를 보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그렇지만 진보성이나 개혁에 대한 인식이 흐릿한 사람이다. 장식적인 좌파 제스츄어를 혐오하고 - 체 게바라 티셔츠/RATM 류에 대한 기계적 감상 쓰레드(또는 쓰레기들) 등 - 도무지 급진적일 수 없는 내 생래적인 소심함과 겁쟁이 기질을 부끄러운 '줄만 아는' 그런 사람이다.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의 특별한 기분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원동력이 23일의 '뉴스속보' 때문이라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 스스로에게나 그 상황 자체나. 아무튼 그 날은 기뻤다. 아주 기뻤다. 정말 기뻤다. '비 더 레즈'로 사람을 '좆나 흔한' 애국자로 만들더니 연말엔 이런 선물을 주는구나 싶었다.

나의 그에 대한 지지 철회는 신속한 것이었다. 그건 지지 철회라는 거창한 수사에 어울리지 않는 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일이었고, 그만큼 누추하고 후진 것이었다. 여전히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키워드. 파병. 대추리. 새만금. 노동계. 그리고 무엇보다 노무현 그 자신. 난 그랬었다. 물론 상당 부분의 영역은 노무현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그가 이 나라 대통령이었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만성이 된 마음의 폐쇄와 현 정권이 안겨준 최고성능의 바이러스 '열패감 주입' 덕에 정작 최근의 검찰 수사는 허망하게 바라보는 구경의 대상이 되었다.


23일 오전이었다. 잠이 깬 후 그냥 곧장 TV를 켰다. 아무 생각없이.
SBS의 화면의 1/3을 채우는 것은 파란바탕 배너에 노란 폰트였던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모국어는 신속하게 읽힌다. '자'라고 적힌 글자를 왜 우리는 '자'라고 읽어야 하는지 새삼 되물을 때도 있는데 대체로 이런 필터링 없이 우리는 자와 살을 연결해 바로 '자살'이라고 읽고 뇌로 인식하고 그 단어가 가진 심상을 느끼고 엄청난 무게감을 체감한다. 그로 인한 한 개인의 불행과 주변 가족들의 불행과 심적 충격, 사후 처리, 그 이름값이 야기할 여파와... 최근 작년부터 몇몇 연예인들이 우리에게 안겨준 심적 공황으로 우리가 어설피 훈련이 되어 있다고 치더라도. 이건.




내가 가졌던 희망이 헛꿈이었던 것은 객관적 사실이었던 거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길 바라진 않았다. 당연하잖아. 내가 지지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난 그이가 그이 특유의 에너지와 캐릭터로 의미있는 다른 일들을 해내리라, 앞으로 보여줄 일들이, 끼칠 영향이 있다고 믿었다. 그이의 봉하마을은 여전히 지금의 청와대보다 훌륭한 곳이었고, 그의 마이크가 박근혜의 수첩보다 가치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


구미 분수대 부근에서 그의 탄핵 당시 철회 촛불을 들었던 두 자리의 구미 시민들이 새삼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을 취재하고 난 뒤에 작성한 기사로 같은 구미 시민의 악플을 선사받았던 경험도. 난 여전히 숱하게 첨예한 사람들, 또는 흔하게 무던한 사람들 사이에서 움츠린 채로 살고 있다. 그렇게 모니터를 바라보며 뇌까린다.

명복을 빕니다.라고.




스스로에게도 되묻는다. 울지 않는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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