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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라도 해요. 본문

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

인사라도 해요.

trex 2011. 11. 3. 16:15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하루 인사라도 해요."


성큼 다가와서 건 첫마디가 저랬었다. 매일 눈에 띄던 사람이었다. 8번 출구를 나와 오르막길인 출근처를 향해 걷다보면 매일 지나치던 사람. 하긴 머쓱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지하철을 빠져나와 당도하기엔 횡단보도 2개는 좀 너무했다. 거리가 멀진 않았지만 고약한 도로였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라도 마주칠라치면, 매번 보는 얼굴이 분명하니 힐끗 상대의 옷차림을 점검하기에도 계면쩍고 아예 모르는 척 다른 일에 몰두하려 해도 마땅한 일이 없었던 터였다.


그러던 하루하루였는데, 오늘은 웬일로 내 편으로 갑자기 걸어와 말을 걸어오는 것이 저 첫마디였다. 웬일이라는 표현도 쑥스럽다. 서로에게 말을 걸 일 자체가 예상범주에 있지도 않았다. 따지고보면 서로 철저한 타인이니까. 사실 모른체해도 아무 이상할 일이 없을 사이 아닌가. 의식적인 무관심과 모른 체는 오히려 상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한쪽에서 그 상식의 저울을 한쪽으로 눌러 다가왔다.


못내 반가웠다라고 적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실은 그이 외에도 숱한 사람들과 매일 오전 지나쳤을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말을 건네는 하루의 파격을 감행한 그이가 반가웠다. 의식해 왔던게지. 횡단보도 저편의 그이를 보고, 짧은 일일 평가를 하던 나였다.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뭘 챙기는 것일까, 여자들은 왜 야상 차림을 좋아하는걸까, 음악은 안 듣는 모양이지, 방금 나를 잠시 봤다.


 



서로를 의식할 바엔 그이는 이 방법을 택한 모양이다. 미심쩍고 다소 불편한 의식이 있어온 오전을 화평하게 보내는 방법. 그 시도와 용기에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정작 인사는커녕 합죽이가 되어 '하루 인사'라는 낯선 조어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신속한 머릿속 계산만이 오갔다. 잠시 감탄을 머금고 말이다. 가까이보니 무방비로 드러난 기미와 주근깨의 배열이 백색 바탕의 은하계 같다. 그녀는 미인이었다.


"어떡하긴요. 지나칠 때마다 안녕하세요? 힘내요!나... 수고해요 이런 인사를 하는거죠."


거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새로운 고민만 말풍선을 키웠다. 앞으로 매일 건네야 할 인사는 천편일률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이의 하루 심리를 지배할만치 시의적절하고 정제된 적합한 언어여야 할 것. 한계는 명확하다. 난 그이가 뭘하는 사람인지 아직 알 도리가 없고, 될 수 있으면 그 정보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이 없다. 내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성격임은 알지만 그 또한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나의 인사는 디자인 시안 꼭 통과되세요!라는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잘 할거에요!의 형식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짧은 합의를 마치고 나는 내 방향대로 그이는 그이의 방향대로 서로 걸어갔다. 좀더 좋은 전망의 하루를 보장받은 것이다. 4시간 뒤 파견 근무 대상자로 지정된 것임을 알 때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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