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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

협상 결렬

trex 2012. 12. 4. 17:16

협상은 불발이 되었다. 독립해방군 대표와 평화탈환연맹 임시 대표의 만남은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잠시간 민중들의 희망을 품게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게 원점이 되었다. 이런저런 협상을 제외하고서라도 당장에 밀양시 가곡동의 구 KT&G 지하에 있는 로봇 군단의 동기화 서버 몇 대라도 박살을 내는데 합의를 봤어야 했다. 한 팔에 유탄을 장착하고 나머지 한 팔에 공구용 드릴을 장착한 Q1022는 효과적인 살상 병기였다. 이들의 전투 행동양식 모듈을 동기화 패치 하는 곳은 첩보대로 밀양의 서버들이었다. 청도는 물론, 경산까지 올라오는 Q1022들 덕에 의기양양하던 대구 진영은 근래 자주 불안감을 표시했다.


독립해방군 대표와 평화탈환연맹 임시 대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주된 이유는 두 단체의 명칭 때문이었다. 공구용 드릴로 민간인들의 몸통에 구명 세례가 나는 판국에 고작 명칭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점에서, 강원국의 비웃음이 되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카지노 건물들을 개조해 능수능란한 방어전은 물론 잦은 보도방송으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한 강원국으로선 충분히 할 수 있는 조소였다. 그 세라는게 군부대 밀집 지역의 물자를 빼돌린 덕이 아니냐는 비아냥은 아무튼 옛일이었다. 지금 당장엔 명칭 문제로 협상을 결렬시킨 두 단체가 문제였다.


평화탈환연맹 임시 대표 차범규가 지적한 문제는 '독립해방'에서의 독립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이냐는 것이었다. 고작해야 군납품 또는 가사용이었던 로봇들이 반란이라는 거창한 일로 이 땅의 인간사들을 하루 아침에 탈바꿈시켰다 하더라도, 이것이 애초에 '독립'이라는 단어로 규정지을 것이냐가 그의 첫 꼬투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내내 강조했던, 태초의 '인간문명사회'가 간직한 '평화 탈환'이 급선무라는 발언은 촌스럽지만 그럴싸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독립해방군 대표 성지오가 저자세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척이라도 할리는 없었다.


성지오의 말에 의하면 '독립해방'은 단순히 잠시 동안의 로봇 군단의 지배에서의 독립이 아닌, 이번 전쟁의 종식 후 인간문명이 보여줄 새로운 경지의 르네상스를 예고한다는 차원이라고 한다. 말과 말 사이의 공방에서 앞서 눌린 분을 참지 못하고 급한대로 나온 말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한 단체의 대표로서의 이 발언을 쉽사리 코웃음치고 누를 이도 없었다. 협상은 진지한 분위기로 포장되었어야 했고, 두 대표는 이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했다. 문제는 커튼콜은커녕 협상은 별반 수확도 없이 마무리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해커 부대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밀양시 가곡동 동기화 서버들은 견고했고, 다음 업데이트 때 Q1022 부대들이 보여줄 프레임의 유연함은 함부로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통영에서 접수된 더욱 절망적인 첩보는 로봇 군단이 자체 개발한, 쇄빙선과 포크레인 등의 중기계들이 잡다하게 결합한 9.4미터짜리 4족 보행 물체가 어선 4척을 순식간에 박살냈다는 소식이다. 상륙 후 주변 바퀴 로봇들의 비호를 받으며 창원으로 향하고 있다니 우리는 5시간쯤 뒤면 불행한 소식을 추가로 들을지도 모르겠다.

 

 

 

 

 

2012/03/19 - [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 - 로봇 살인 사건. 

2012/03/20 - [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 - 보고서를 쓸 시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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