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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고감상정리

[고백], 현세지옥(現世地獄)

trex 2011. 4. 15. 11:26
+ 한겨레 웹진 HOOK에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25611

2011/04/10 - [영화보고감상정리] - [고백] 현세지옥. 의 강화판 격인 글입니다.

 나카시마 데쓰야([불량공주 모모코], [험난한 마츠코의 일생])의 근작 [고백]의 초반 30분은 근간에 본 영화 중 가장 강렬하다. 담임 선생역으로 분한 마츠 다카코([4월 이야기])는 종업식 동안 학생들을 의례적인 멘트와 개인적인 이야길 섞는데, 학생들은 이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소위 ‘교실붕괴’ 현상에 걸맞는 여러 광경들이 효과적인 편집에 실려 묘사되는데, 아이들은 잡담하거나 의도적으로 담임의 말을 경청하지 않거나 자기들끼리 모바일 메시지를 바쁘게 주고 받기에 바쁘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담임은 단 몇 문장으로 아이들의 시선과 주의를 집중시킨다. 지금 이 학급 안엔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죽인 살인범 2명이 있다는 것. 청소년 보호법에 의해 비호를 받는 이 학생들을 법적으로 단죄할 수 없는 담임은 몇마디의 방법과 규칙을 설명함으로써, 이 시간 이후부터의 교실을 침묵의 아비규환으로 만들고 자리를 뜬다. 그리고 1년간의 지옥이 펼쳐진다. 이 부분이 영화 초반의 30여분을 차지하는데, 그 자체로도 제법 완결성 있는 별개의 단편영화로 보일 정도다.(물론 실제로 단편영화화하기엔 초보 감독들이 애를 먹을 정도의 기술력과 자본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나머지 1시간 20여분은 무얼 하는가. 등장인물 제각각의 마음속 지옥도를 묘사하는 것이다. 관객들을 혼란과 계산에 빠트릴 정도는 아닌 효과적인 연출 덕에 [고백]은 심도있는 심리묘사극 보다 오락대중물에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다. ‘교실붕괴’를 위시한 ‘인명경시’와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에 대한 경고로 보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건 그냥 제스처나 스케치에 가까운 듯 하다. 작품이 관객들에게 주로 묻고자 하는 핵심적인 주제는 ‘우리가 만든 세상이 왜 이렇게 위태로울까요?’쪽 보단 ‘우리들의 이토록 위태로운 인간성은 존중받고 있나요?’에 가깝지 싶다. 거시적이고 거창한 시스템에 대한 재고 보다는 지엽적이고 민감한 소재에 천착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다만 영화에 대한 인상을 크게 키우는 것은, (아마도)근래 들어 나온 일본 영화 중 유례없이 화면 전반에 넘치는 ‘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는 본작의 프로듀서인 가와무라 겡키 등이 말했듯, 어느 정도는 [살인의 추억], [추격자]를 위시한 한국영화에 받은 일부의 영향성도 있는 듯 하다. 실제로 [고백]의 도입부는 ‘주인공의 운명을 바닥에 처하게 한 범인’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올드보이] 등을, 사적 단죄의 이야기 구성은 [친절한 금자씨] 등을 연상케 한다.(반면 이 일군의 영화들에 영향받는 우리 자국 영화들은 설정 허약으로 평단에서나 시장에서나 맥을 못추고 있는 현실이다.)

회색톤에 가깝게 창백해진 청색톤의 화면과 고속 카메라,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기교 전시형의 편집과 코믹스럽기까지 한 장르 장난까지 보자면, 한참 때 올리버 스톤의 [내츄럴 본 킬러]가 떠오를 정도다. 이어 나오는 파괴적인 신체 훼손 장면에 닿으면 이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숙고와 교양의 영역이 아니라, 다소간 피학적인 오락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과 카타르시스가 동시에 몰려온다. 여기에 여학생 교복에 내재된 에로티시즘을 굳이 숨기지 않는 – [에반게리온] 등으로 익숙한 – 일본 대중문화 특유의 코드까지 가세하면 영화가 담고 있는 진심을 잠시 의심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넘치는 ‘힘’을 담은 영화의 구성은 매혹적이고 가차없다. 영화의 장점이자 패착이 모두 한꺼번에 담긴 ‘거꾸로 도는 시계’와 ‘가방’ 장면(스포일러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은 그야말로 정점인데, 그 처절함이 상세한 나머지 지루한 면마저 있다. 그럼에도 그 절절함은 결국 우리가 사는 현세와 저쪽 내세의 지옥이 한 겹의 레이어 차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그러나 소름끼치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어 영화는 원작 소설엔 없었다던 주인공의 눈물까지 가세해 의미심장하고도 근육의 긴장을 푸는 마지막 대사를 던진다. 그리고 암전. 적잖이 압도당했다.

오락적이고 기교의 전시장 같은 면이 상당하지만, 영화가 던지는 전망은 심히 암울하다. 초법적인 히어로의 활약이나 영웅적인 법의 사도가 휘두르는 활약상은 희열감을 주지만, 사적 영역에서의 이를 악문 단죄는 주인공의 앙상한 육체를 보는 기분처럼 쓰라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마저 마음 편하게 껴안을 수 없는 것은, 이 완결을 위해 필요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당했다는 엄연한 사실이며 윤리적 질문이란 것은 요즘 관객들에겐 가혹한 과제라는 점이다. [고백]이 담고 있는 근심스러운 전망은 생명에 있어 존엄은 명제일진대 그 순위를 따지게 되는 당혹스러운 현실, 자신과 하루하루를 나누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내재한 폭력성, 삶과 지옥을 가르는 선의 경계가 흐릿하고 얇다는 잔혹한 대리체험에 있다. 도처에 널린 주검들과 사건 사고를 알리는 흉흉한 보도와 작금의 세태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터에서 존엄을 지키고는 있고, 타인에게 보장받기는 하는걸까? 영화가 가진 풍채는 사실 허약해서 이 모든 것을 품지는 못하나, 이 질문들은 오히려 암전이 시작된 그 시점부터 관객들에게 시작된다. 영화 [고백]은 일종의 지옥으로 입문하는 오프닝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영화 속 등장인물들조차도 지난 1년이 아니라 앞으로의 길이 정녕 지옥임을 실감할 것이다.

+ 글의 제목은 넥스트의 앨범 [개한민국] 수록곡에서 따왔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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