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에 해당되는 글 5건
- 2012/03/20 보고서를 쓸 시간이 아니었다.
- 2012/03/19 로봇 살인 사건. (2)
- 2012/03/14 거친 마음.
- 2011/11/07 능력.
- 2011/11/03 인사라도 해요.
솔 담배가 마지막 한 가치만을 남겨두고 입술과 공기 사이에서 사라졌다. DJ는 속절없이 임지훈의 '사랑의 썰물'을 연거푸 재생할 뿐이다.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오빠의 호언장담이 맞았다. 오빠가 말한대로 핸드폰은 오빠의 배 위에서 어떤 지지대나 줄도 없이 홀로 두둥실 떠올랐다. 몇초간 떠 있다가 바닥에 떨어지며 뒹굴기는커녕 제법 몇분간 떠있다가, 오빠의 심호흡 후 스물스물 손바닥 위에 내려왔다. 어린 시절 유리겔라의 숟가락 초능력 이후 - 몇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이 사기라고 했다 - 가장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게다가 TV 화상도 아닌 내 눈 앞에서 바로. 그것도 오빠가.
오빠의 미소가 환했다. 오빠의 실행은 이어졌다. 머그컵, 컴퓨터 하드, 칫솔, 핸드크림통 등이 아까 핸드폰처럼 오빠의 배 위에서 흔들흔들 떠올랐다. 오빠는 난처함도 동시에 표했다. 이게 전부고 이게 한계라고. 이걸로 딱히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진전되는 것도 아니라고. 가령 잠긴 핸드크림통이 열리거나 하는 응용력의 범주나, 좀더 무거운 데스크탑 따위를 염력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건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뭔가 내 눈치를 보는건지 앞으로 좀더 계발해 보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오빠의 눈치. 아마도 오빠는 이 능력으로 뭔가 타계책을 마련하고팠던 모양이다. 어떤게 가능할까. 오빠가 이 능력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서서 관객들을 감탄시키고 돈을 벌면, 그가 바라는 바대로 될까. 오빠는 좀더 영화적이고 근사한 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능력으로 은행 보안 담당자의 키를 손에 넣고 은행 안의 금들을 깨끗하게 털고... 어떤 방안이든지 오빠는 마련하고팠던 모양이고, 그 이유엔 내가 있었음은 사실일 것이다. 진작에 알았던 사실이었고 그만큼 두려운 사실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앞으로도 나를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 노력은 분명 그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행복'을 위한 것일테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역시 그 사실을 명제처럼 인식하고 나와 2년간 해온 것이리라. 나는 대체로 행복했고 때론 굉장히 만족했고 고마워했다. 아마도 오빠는 어느날 문득 발견한 '능력'으로 인해 그가 그토록 추구해온 '행복'을 위한 열쇠를 마련할 수 있다는 확실한 자신감을 얻은 듯 하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결실로 인한 수확물은 내게 주어질 것이다. 그게 온당한 일일까 아닐까하는 질문 자체를 오빠는 막을 것이다.
지하철 8호선의 땅굴로 사라진 오빠를 배웅한 뒤, 편의점에 들려 플레인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았다. 오빠가 다이아몬드 채굴로 유명한 아프리카 어느 국가의 독재자에게 요구르트를 건넨다. 독재자가 흡족하게 빨대로 요구르트를 마시는 동안 오빠가 '능력'으로 빨대를 식도로 넘겨버린다. 독재자는 호흡곤란으로 사망하고, 그 나라의 채굴권을 오빠가 획득하고 그걸 나에게 죄다 바친다면? 쓴웃음을 짓고, 오늘 하루도 그에게 정리의 단초조차 끄집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어둑한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하루 인사라도 해요."
성큼 다가와서 건 첫마디가 저랬었다. 매일 눈에 띄던 사람이었다. 8번 출구를 나와 오르막길인 출근처를 향해 걷다보면 매일 지나치던 사람. 하긴 머쓱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지하철을 빠져나와 당도하기엔 횡단보도 2개는 좀 너무했다. 거리가 멀진 않았지만 고약한 도로였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라도 마주칠라치면, 매번 보는 얼굴이 분명하니 힐끗 상대의 옷차림을 점검하기에도 계면쩍고 아예 모르는 척 다른 일에 몰두하려 해도 마땅한 일이 없었던 터였다.
그러던 하루하루였는데, 오늘은 웬일로 내 편으로 갑자기 걸어와 말을 걸어오는 것이 저 첫마디였다. 웬일이라는 표현도 쑥스럽다. 서로에게 말을 걸 일 자체가 예상범주에 있지도 않았다. 따지고보면 서로 철저한 타인이니까. 사실 모른체해도 아무 이상할 일이 없을 사이 아닌가. 의식적인 무관심과 모른 체는 오히려 상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한쪽에서 그 상식의 저울을 한쪽으로 눌러 다가왔다.
못내 반가웠다라고 적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실은 그이 외에도 숱한 사람들과 매일 오전 지나쳤을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말을 건네는 하루의 파격을 감행한 그이가 반가웠다. 의식해 왔던게지. 횡단보도 저편의 그이를 보고, 짧은 일일 평가를 하던 나였다.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뭘 챙기는 것일까, 여자들은 왜 야상 차림을 좋아하는걸까, 음악은 안 듣는 모양이지, 방금 나를 잠시 봤다.
서로를 의식할 바엔 그이는 이 방법을 택한 모양이다. 미심쩍고 다소 불편한 의식이 있어온 오전을 화평하게 보내는 방법. 그 시도와 용기에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정작 인사는커녕 합죽이가 되어 '하루 인사'라는 낯선 조어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신속한 머릿속 계산만이 오갔다. 잠시 감탄을 머금고 말이다. 가까이보니 무방비로 드러난 기미와 주근깨의 배열이 백색 바탕의 은하계 같다. 그녀는 미인이었다.
"어떡하긴요. 지나칠 때마다 안녕하세요? 힘내요!나... 수고해요 이런 인사를 하는거죠."
거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새로운 고민만 말풍선을 키웠다. 앞으로 매일 건네야 할 인사는 천편일률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이의 하루 심리를 지배할만치 시의적절하고 정제된 적합한 언어여야 할 것. 한계는 명확하다. 난 그이가 뭘하는 사람인지 아직 알 도리가 없고, 될 수 있으면 그 정보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이 없다. 내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성격임은 알지만 그 또한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나의 인사는 디자인 시안 꼭 통과되세요!라는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잘 할거에요!의 형식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짧은 합의를 마치고 나는 내 방향대로 그이는 그이의 방향대로 서로 걸어갔다. 좀더 좋은 전망의 하루를 보장받은 것이다. 4시간 뒤 파견 근무 대상자로 지정된 것임을 알 때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