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5.01.06 엽편 : 식권 식겁
  2. 2012.12.04 협상 결렬
  3. 2012.12.03 마른 등
  4. 2012.03.20 보고서를 쓸 시간이 아니었다.
  5. 2012.03.19 로봇 살인 사건. (2)
  6. 2012.03.14 거친 마음.
  7. 2011.11.07 능력.
  8. 2011.11.03 인사라도 해요.
posted by 렉스 trex 2015.01.06 22:42

쓸모없는 정보의 집산 같은 두툼한 지갑 안엔 아직 식권이 5장 남아 있었다. 오늘도 식당 안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하얀 접시를 들고 옹기종기 움직이며 각 코너를 면밀히 탐색 중이었다. 그들은 간혹 신랑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신부의 외모에 대해 실상 필요없는 힐난을, 세속적인 주례 진행으로 일관한 성당 신부님에 대해서는 뒷담화를 하긴 했지만 진지하진 않았다. 하지만 식당 안의 공기만큼은 달랐다. 건강진단서 종이짝이 주는 무게감을 상기하듯 보다 균형 잡힌, 허나 주말 안에 허락된 일말의 소중함을 상기하듯 절묘하게 기름진 각자의 접시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릇 결혼식 이후의 뷔페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게 2달 전 일이다. 나이 36에 일찍이 돌아가신 부친 덕에 홀로 남은 모친과 단둘이 사는 형편에 아직 제대로 연애는커녕 "니 앞으로 혼자 살라카나? 우얄라꼬 저카는가 몰라."라는 푸념 섞인 질문에 매끈한 답변 하나 준비 못 하는 사정이라, 예의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부담스러웠던 차였다. 마침 축의금 코너에 사람 좋은 사촌 형님이 먼저 앉아 계시길래 그 일을 내가 자처했다. 친지 어르신들을 직격으로 대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신랑 신부 다음으로 바쁜 보직인지라 잔소리 회피에도 용이했고 정작 식이 시작되어도 배 아픈 광경에는 제외될 수 있다는 장점이 매력적이었다. 예상대로 작은아버지의 평소 산악회를 중심으로 한 인맥이 유효하게 작용하여 축의금 받고 계산하기 바쁜 1시간 55분여였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내 손에 남게 된 식권이 7장 정도 되었다.



성당에 다소 떨어진 부속건물의 식당이라는 점이 일차적으로 유리했고, 무엇보다 식권 뒤에 식별이 가능한 별도의 도장이 없다는 점이 이차적으로 유리했다. 그렇다. 내 손에 남게 된 식권 7장을 내 하루 일당인 양 셈하고, 앞으로도 간간히 써먹기로 한 것이었다. 이 정도 도발도 내겐 나름 1박 2일간의 고민이 소요되는 도발이었다. 사실 결혼식장 뷔페 음식 수준이야 김밥천국과 김씨네김밥 사이 수준의 줄타기이고, 만에 하나 발각되었을 때의 거대한 포말을 안으며 밀려오는 면구스러움 또한 각오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창조경제의 기치를 들고 열심히 파국의 불황으로 향하는 서민경제의 형국과 '그래도 공짜 식사인데!'라는 얄팍한 가계부 계산속이 나를 발걸음하게 만들었다. 



딱딱하다는 개념에 가까운 차가운 설탕 육회, 식어버린 찹쌀떡에 생선을 대충 올린듯한 초밥, 고무처럼 질긴 갈비짝, 무성의한 아이스크림의 마무리까지... 4,000원짜리 콩나물국밥만도 못한 메뉴들이거늘 지난번 무단 뷔페 이용 클리어 1회차에 나는 깨달았다. 난 이곳이 제법 맘에 든다는 사실이 말이다. 추가 구성의 바베큐 메뉴 때문은 아니었고, 이 적당한 싸구려 분위기와 식권 하나면 통과되는 분잡함 속의 익명성이 나의 주말을 적당히 때워줄 유희가 될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이것은 나름의 전략성도 구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성당이라고 수시로 식을 열리는 것은 아니었기에 계약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월별 길일에 찾아야 했고, 식을 마친 직후 사람들의 인파로 북적해지기 바로 직전의 한적한 시간대가 중요하였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4바퀴짜리 싸구려 성찬이 완료되는 셈이다. 나름 괜찮지 않은가?



생선튀김볼과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삶은 게 조각, 돼지고기 차슈 덩어리가 올라와 있는 2번째 접시를 막 비울 찰나였다. 폐백을 마치고 간략한 피로연의 절차를 밟은 오늘의 신랑 신부가 들어올 시간대였다. 인연 없는 인생들이지만 입장의 문턱이 낮은 성당 결혼식 뷔페로 인해 소중한 또 한 번의 기회를 부여한 이들이다. 그들을 위해 우물거리는 턱을 들며 눈으로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인연 없는 인생들이라는 내 짧은 정의를 박살 내며, 지각 능력은 그들이 내게 인연이 있던 이들임을 상기시켰다. 그 신랑 신부는 차명균과 신예희였다. 



짧게 광희가 서렸던 연애, 그 연애의 한 지점에서 벌어진 군입대라는 사건, "잘 부탁드려요"라는 진심의 인사를 건네며 한 사람을 믿었던 20대 후반의 초라한 순진함, 그 순진함이 야기한 대참사가 이뤄낸 이 행복한 결실, 이 광경을 내 의지와 내 눈으로 본의 아니게 목도하니 고깃살은 제대로 씹히지 못한 채로 식도를 넘어갔다. 3번째 접시는 아쉽게도 채워지지 못했고, 지갑 안의 남은 식권들은 남은 기회를 채우지 못할 운명이었다. 나는 황급히 빠져나가 인근의 카페에서 가장 쓰디쓴 커피를 파는 곳이 어디일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이 행진곡을 마무리 짓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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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은 불발이 되었다. 독립해방군 대표와 평화탈환연맹 임시 대표의 만남은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잠시간 민중들의 희망을 품게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게 원점이 되었다. 이런저런 협상을 제외하고서라도 당장에 밀양시 가곡동의 구 KT&G 지하에 있는 로봇 군단의 동기화 서버 몇 대라도 박살을 내는데 합의를 봤어야 했다. 한 팔에 유탄을 장착하고 나머지 한 팔에 공구용 드릴을 장착한 Q1022는 효과적인 살상 병기였다. 이들의 전투 행동양식 모듈을 동기화 패치 하는 곳은 첩보대로 밀양의 서버들이었다. 청도는 물론, 경산까지 올라오는 Q1022들 덕에 의기양양하던 대구 진영은 근래 자주 불안감을 표시했다.


독립해방군 대표와 평화탈환연맹 임시 대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주된 이유는 두 단체의 명칭 때문이었다. 공구용 드릴로 민간인들의 몸통에 구명 세례가 나는 판국에 고작 명칭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점에서, 강원국의 비웃음이 되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카지노 건물들을 개조해 능수능란한 방어전은 물론 잦은 보도방송으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한 강원국으로선 충분히 할 수 있는 조소였다. 그 세라는게 군부대 밀집 지역의 물자를 빼돌린 덕이 아니냐는 비아냥은 아무튼 옛일이었다. 지금 당장엔 명칭 문제로 협상을 결렬시킨 두 단체가 문제였다.


평화탈환연맹 임시 대표 차범규가 지적한 문제는 '독립해방'에서의 독립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이냐는 것이었다. 고작해야 군납품 또는 가사용이었던 로봇들이 반란이라는 거창한 일로 이 땅의 인간사들을 하루 아침에 탈바꿈시켰다 하더라도, 이것이 애초에 '독립'이라는 단어로 규정지을 것이냐가 그의 첫 꼬투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내내 강조했던, 태초의 '인간문명사회'가 간직한 '평화 탈환'이 급선무라는 발언은 촌스럽지만 그럴싸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독립해방군 대표 성지오가 저자세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척이라도 할리는 없었다.


성지오의 말에 의하면 '독립해방'은 단순히 잠시 동안의 로봇 군단의 지배에서의 독립이 아닌, 이번 전쟁의 종식 후 인간문명이 보여줄 새로운 경지의 르네상스를 예고한다는 차원이라고 한다. 말과 말 사이의 공방에서 앞서 눌린 분을 참지 못하고 급한대로 나온 말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한 단체의 대표로서의 이 발언을 쉽사리 코웃음치고 누를 이도 없었다. 협상은 진지한 분위기로 포장되었어야 했고, 두 대표는 이 무대 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했다. 문제는 커튼콜은커녕 협상은 별반 수확도 없이 마무리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해커 부대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밀양시 가곡동 동기화 서버들은 견고했고, 다음 업데이트 때 Q1022 부대들이 보여줄 프레임의 유연함은 함부로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통영에서 접수된 더욱 절망적인 첩보는 로봇 군단이 자체 개발한, 쇄빙선과 포크레인 등의 중기계들이 잡다하게 결합한 9.4미터짜리 4족 보행 물체가 어선 4척을 순식간에 박살냈다는 소식이다. 상륙 후 주변 바퀴 로봇들의 비호를 받으며 창원으로 향하고 있다니 우리는 5시간쯤 뒤면 불행한 소식을 추가로 들을지도 모르겠다.

 

 

 

 

 

2012/03/19 - [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 - 로봇 살인 사건. 

2012/03/20 - [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 - 보고서를 쓸 시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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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가 춤추는 아이를 만난다고 말을 털어놓은 것은 카페에서 자리를 정한지 13분여 후 남짓이었다. 이번에는 13살 차이라고 했다. 경애 자신이든 우리든 하얗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피부를 가진 경애의 유리한 조건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바텐더, ROTC 장교 아이, 음악하는 애, 그냥 잠자리만 잘하는 노는 아이 등 경애의 연애사에서 +1 하나 더 붙는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문제는 경애의 등이었다. 경애가 엉겁결과 의도된 시나리오 사이의 잠자리를 마친 후, 남자의 데워진 손길이 등을 타는 순간을 즐기는 것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경애가 젊음이라는 가치에 천착하게 된 것은 얼마전부터의 일이었다. 지도 교수의 바삭 마른 고목 결 같은 손길이 위안보다는 측은을 낳게 하고, 서로간의 사려가 아닌 착취와 탐식이라는 당연한 수순으로 향했을 때 경애는 학부생 아이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정윤이 둘째가 다니던 고발 프로그램에 나온 어린이집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중에 경애는 3명의 아이들을 오갔고, 성희가 전세살이를 2년 동안 3번 이사한 동안에 경애는 6명의 아이들과의 짧은 관계를 청산하였다. 내가 혼전임신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을 4년여 만에 차분히 박살냈을 때, 경애의 그동안의 연애사가 얼마나 불꽃놀이 같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경애의 말로는 춤추는 아이는 이전에 만났던 아이 - 소년이라 해도 될 듯 하고, 청년이라 될 듯한 경애를 거쳐간 군집체들 - 들과 달리 좀더 상식이 부족하며, 입이 좀 더 험하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이지 않아도 될 사실은, 경애가 그 아이를 선택한 이유는 그럼에도 여전히 등을 따스하게 쓸어줄 '젊은 손바닥'을 '춤'은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경애가 말한 그 아이가 거리에서 춤을 추는 광경을 상상하였다.

 

차디찬 세상이 인공적으로 조성해놓은 땅바닥에 경애의 마른 등을 쓸어주는 용도 대신 물구나무가 된 온 몸을 지탱한 순간, 손바닥의 살갗과 근육이 조성하는 절박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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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렉스 trex 2012.03.20 15:24
"SWOT 분석을 먼저 해봐. 곧 우리 물건이 군납 입찰 들어가거든. 경쟁사 대비 경쟁력이 있을지 없을지 한번 타당성을 따져보라구. 대리지만 과장급의 시선으로 한번 만들어 보라고."


파견 배치 후 가장 먼저 받은 업무 지시는 이런 것이었다. 업무지만 사실상 업무가 아닌 것, 뭘 시켜야할지 상대에 대한 파악이 도무지 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시키는 일. 뻔한 노릇이다. 장팀장님과는 일면식도 없었고, 첫 인사 이후부터 서먹했고 뭔가 서로간의 아귀가 맞아 들어갈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다소 난감하다. 기획자라는 포지션은 같았지만, 서로 일하던 필드가 애시당초 달라 어법이 다르고 문서 양식이 달랐다. 서로간의 이해에 의해 맞춰가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려 보였다.


SWOT 분석이라는 업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찰이라고는 하지만, 실상 우리가 군납을 맡을 것은 본사에서 귀뜸만 들어도 확실한 사실이었다. 지금 경쟁력 분석하고 경쟁사 비교할 시간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입찰 후의 움직임을 생각해야 할 시점에 대리급이라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일을 던져주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팀장님의 의견은 개인 업무 능력 향상이라는 명분인 모양이다.(이마저도 장팀장님 본인에게 들은게 아니라, 건너서 들은 표현이다) 글쎄요. 전 이런게 지금 필요한게 아니고 제가 왜 파견되었는지 근본적인 이유부터 알고 싶네요.


무엇보다, 그 어떤 결정적인 무엇보다 일이 하기 싫었다. 워낙 벼락같은 파견 명령이었고 이틀만에 바로 대전에 내려와야했다. R&D 연구소 내에 있는 사원 숙소에서 모든걸 해결할 수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게 서울에 남겨둔 개인적 사정까지 깨끗이 정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모든 과정은 황급했고 갑작스러웠다. 몸과 마음의 잉여물을 서울 군데군데에 잔뜩 묻어온 기분이었고 여기에 포스트잇처럼 부착할 수 있는 마음의 잔정은 여간해서 싹을 트지 않았다. PPT 문서는 여기서부터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별 의미도 없는 언어를 뱉어낼 힘조차 들지 않았다.


 

커서 부근은 깜빡거리고 있지만 모니터 저편의 '횡단보도 그녀'가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서 다소곳이 서있을 뿐이었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하루 인사라도 해요."


라는 첫마디의 울림이 식지도 않았는데, SWOT 분석이 웬말인가. 현재 시점에서의 그녀를 향한 나의 장점 단점 기회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싶을 뿐이었다. 단 몇초만에 이성을 짝짓기해주는 유틸리티가 즐비한 세상에 나는 기억력에 의존해 '횡단보도 그녀'의 잔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무슨 노릇인가 이게.


PPT창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을 듯 하여, 억지로나마 쾌청한 마음을 불어넣으며 포털의 뉴스란을 펼쳐보았다. '[속보] 국내 첫 로봇 살인 사건 발생.'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지금 우리 회사가 군납하려는 QME3의 민간형 프로토 모델 Q49에 관한 소식이었다. 본사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출퇴근한 제4 부설연구소가 왈칵 뒤집혔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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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렉스 trex 2012.03.19 14:32
첫번째 '로봇 살인 사건'의 주인공은 세양일렉트로닉에서 나온 Q49 모델이었다. 세양일렉트로닉은 7월 9일 3번째 펌웨어 업데이트를 공지한 후, 자동으로 실행하고 개선 효과를 고객들에게 공지한 터였다. 사건은 7월 28일 중구 회현동 모처에서 발생하였다. 피해자는 39세 김**씨. 동물보호협회 소속 외엔 일정한 직업이나 수입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경찰은 덴마크에 거주중인 가족들이 지난 14년간 지속적인 입금을 해줬음을 밝혔다.


세양일렉트로닉은 사건이 펌웨어 업데이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유사한 형태의 오류는 다른 구매자들에게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신속히 밝혔다. 시중에 판매된 것으로 추산되는 Q49 모델의 대수는 총 4,508대. 로봇 부품 하청업체에서 창업 9년만에 독립 모델을 첫 출시한 이래, 세양일렉트로닉으로서는 자신있는 라인업이었다. 지속적인 업데이트로 최신 모델에 뒤지지 않는다는 시장의 평가를 받는 Q1023은 물론이거니와, 프리미엄 라인업인 Q49 역시 그들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최초의 '로봇 살인 사건'의 주인공일 뿐이다. 출시 모델은 물론 재고는 일거에 수거되었다.


특별히 로봇을 환불/교환할 생각이 없다는 302명의 고객 외에 나머지 수천대는 현재 과학기술처에서 면밀한 검사를 받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눈에 띄는 오류는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프리미엄 모델 답게 음성인식기술이나 운동능력이 상당히 탁월해 사건만 아니었다면 향후 7년간은 사용이 가능했을 듯 하다. 물론 해킹 이력이나 외부 원격에 의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분석도 해봤지만 이 부분 역시 해명된 것은 없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가해자 Q49 모델 보다 피해차 김**씨였다.


사건 현장에서 1차적으로 발견된 것은 어답터선으로 김**씨의 숨통을 끊어놓은 후, 분재를 일정대로 관리하던 Q49였다. Q49는 매뉴얼대로 외부 손님을 우릴 응대했고, 주인이 사정상 부재했음을 밝혔다. 실종신고 후 이틀만이니 최소 16일은 부재중이었던 김씨는 집에 있던 거대한 냉동고 안에서 어답터선으로 목이 감긴 채 발견되었다. 김씨와 더불어 수북하게 쌓인 (노끈으로 감싼)비닐봉지들이 압권이었다. 거기엔 바느질이나 미싱기로 거칠게 붙여진 고양이와 개들의 토막난 사체들이 들어있었다. 머리에서 몸통까지는 개의 부분, 남은 몸통에서 꼬리 부분까지는 고양이의 부분 이런 식이었다. 냉동고에 있던 것들만 해도 38마리의 개와 23마리의 고양이로 추정되었다.


사건이 '첫번째 로봇 살인'이자 '동물가해 범죄자의 사망'으로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동물보호협회 소속이라는 신분 뒤의 김씨는 '고져스키메라닷컴'이라는 계정을 운영중인 '동물가해계의 스타'였다. 그는 생중계보다 편집중계라는 미학을 더 중시했고,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겔베로스의 고양이]라는 인기 작품은 고양이 3마리의 머리를 골든 리트리버의 몸통에... 덴마크에 있는 가족들은 김씨의 이런 취향에 대한 언급은 회피중이다. 그보다는 그들의 아들이자 형제가 로봇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비명횡사한 것의 슬픔을 더 강조하였고, 대체로 그런 시각을 부각시켜줄 주부잡지의 인터뷰만 응하는 듯 했다. 


이 짧은 보고문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지만 - 다만 나중에 조금 더 문장들을 유연하게 다듬을 참이다 - 흥미로운 살해 당시의 정황을 첨언하겠다. Q49 모델과 홈관리 시스템은 사건 당일까지 부분적인 동기화가 되고 있었다. 이 말은 홈관리 시스템이 김씨의 신변에 어떤 이상이 있다면, 위험을 감지하고 의료처와 경비처에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Q49 모델이 홈관리 시스템과 동기화된 부분은 이 부분이 아닌 TV스케쥴링, 수온 관리, 런닝머신 로그 관리 등 부수적인 부분들이었다. 그런데 Q49가 김씨의 숨통을 끊어놓을 때 홈관리 시스템은 어떤 내부 위험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즉 이 말은 Q49가 이 부분을 통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떻게?


무엇보다 Q49는 살인을 실행하고 김씨를 동물 사체들을 보관해두는 거대한 냉동고에 넣어둔 뒤, 지극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듯이 보이)는 가정용 로봇으로 우릴 맞이하였다. 경비처와 과학기술처가 해킹 가능성을 여전히 우위에 놓는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세양일렉트로닉 담당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외부 요인이 Q49를 살인기계로 돌변하게 할 수 있을지는 내겐 의문이 든다. 해당 모델 폐기와 세양 OS 전반의 개선 작업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정작 우리에게 Q49의 로그가 우리에게 진실을 가르쳐줄지는... 다소 난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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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렉스 trex 2012.03.14 20:12



솔 담배가 마지막 한 가치만을 남겨두고 입술과 공기 사이에서 사라졌다. DJ는 속절없이 임지훈의 '사랑의 썰물'을 연거푸 재생할 뿐이다.


"오늘 저희 업장에 오신 소중한 손님 손님 한 분이 유독 많이들 신청하고 계시네요~."


어지러운 나의 지글거리는 뇌 속은 LP 잡음을 뚫고 유려하게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을 재생하고 있건만. 아 여자 련아. 사람 속 태우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토록 한 줌 재 남길 새도 없이 한번에 화르륵 태우고 가는 것이냐. 장사에는 상도가 있다고 하지만 연정의 문제엔 도덕도 윤리도 없는 모양이다. 박정한 사람 속내 간의 전장이다.


련은 국민학교 교사였다. 재잘거리는 것들이 또래 보다 수풀 속 새들이 더 많은 섬동네여서, 이렇게 살다간 말라붙어 거무퉤퉤해지는 사과껍질 같은 인생이 될 듯 하여 무조건 공부만 하였다 한다. 계집애가 공부해서 뭐에 쓰랴는 할머니의 홍두깨질 같은 말에도 오전 등교 오후 등교 가릴거 없이 붙박이마냥 학교에만 붙어 교과서의 언어들을 갈기갈기 주워담았다 한다. 


재잘거리는 것들이 뒷산 새들보다 교정에 더 많았던 국민학교에 부임해서 정작 얻은 것은 교감 선생이라는 작자의 손길 정도였던 모양이다. 그 작자가 련의 둔부를 한 움큼 쥘 때 애써 그이는 저것은 암탉 알을 하나둘 수확하던 할매 손이다 그 할매 손이다 주문이라도 외웠던 모양이다. 달성대공원에서 솜사탕을 뜯니마니 하던 초조한 손길로 저런 곡절을 늘여 놓았을 때 그때 나는 다짐하고야 말았다. 저 사람은 내가 황해 바다의 씨가 마를 때까지 지키고 만다.


다짐을 배신하는 것은 강인한 여심이었다. 련은 민주화 시위인지 만주화 시위인지 도통 알 도리가 없는 일을 벌이는 족속들 중 한 무뢰한과 얼마전에 안면을 튼 모양이다. 그러더니 급기야 그 무뢰한을 지켜줘야 한다는 이해될리 없는 말을 뱉고는 감감 무소식이다. 학교인지 직장인지를 찾아가도 돌아가라는 대꾸만 들었고, 고향집에 전화 걸 처지는 또 안 되는게 내 답답함이다. 태평성대라면 태평성대인데 나같은 행원이 그 무뢰한에 모자랄 바가 도무지 있겠는가? 갑갑함이 다시금 치밀어 오른다.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누를 올바른 길은 아님은 알지만, 오늘은 교감인가 하는 양반을 찾아가볼 심산이다. 련의 행방이나 다시 묻자는게 일차적인 목적이지만 실은 그 못된 더러운 손목을 오늘은 한번 바스러지게 꺾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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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라도 해요.  (0) 2011.11.03
posted by 렉스 trex 2011.11.07 14:43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오빠의 호언장담이 맞았다. 오빠가 말한대로 핸드폰은 오빠의 배 위에서 어떤 지지대나 줄도 없이 홀로 두둥실 떠올랐다. 몇초간 떠 있다가 바닥에 떨어지며 뒹굴기는커녕 제법 몇분간 떠있다가, 오빠의 심호흡 후 스물스물 손바닥 위에 내려왔다. 어린 시절 유리겔라의 숟가락 초능력 이후 - 몇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이 사기라고 했다 - 가장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게다가 TV 화상도 아닌 내 눈 앞에서 바로. 그것도 오빠가.


오빠의 미소가 환했다. 오빠의 실행은 이어졌다. 머그컵, 컴퓨터 하드, 칫솔, 핸드크림통 등이 아까 핸드폰처럼 오빠의 배 위에서 흔들흔들 떠올랐다. 오빠는 난처함도 동시에 표했다. 이게 전부고 이게 한계라고. 이걸로 딱히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진전되는 것도 아니라고. 가령 잠긴 핸드크림통이 열리거나 하는 응용력의 범주나, 좀더 무거운 데스크탑 따위를 염력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건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뭔가 내 눈치를 보는건지 앞으로 좀더 계발해 보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오빠의 눈치. 아마도 오빠는 이 능력으로 뭔가 타계책을 마련하고팠던 모양이다. 어떤게 가능할까. 오빠가 이 능력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서서 관객들을 감탄시키고 돈을 벌면, 그가 바라는 바대로 될까. 오빠는 좀더 영화적이고 근사한 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능력으로 은행 보안 담당자의 키를 손에 넣고 은행 안의 금들을 깨끗하게 털고... 어떤 방안이든지 오빠는 마련하고팠던 모양이고, 그 이유엔 내가 있었음은 사실일 것이다. 진작에 알았던 사실이었고 그만큼 두려운 사실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앞으로도 나를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 노력은 분명 그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행복'을 위한 것일테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역시 그 사실을 명제처럼 인식하고 나와 2년간 해온 것이리라. 나는 대체로 행복했고 때론 굉장히 만족했고 고마워했다. 아마도 오빠는 어느날 문득 발견한 '능력'으로 인해 그가 그토록 추구해온 '행복'을 위한 열쇠를 마련할 수 있다는 확실한 자신감을 얻은 듯 하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결실로 인한 수확물은 내게 주어질 것이다. 그게 온당한 일일까 아닐까하는 질문 자체를 오빠는 막을 것이다.


지하철 8호선의 땅굴로 사라진 오빠를 배웅한 뒤, 편의점에 들려 플레인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았다. 오빠가 다이아몬드 채굴로 유명한 아프리카 어느 국가의 독재자에게 요구르트를 건넨다. 독재자가 흡족하게 빨대로 요구르트를 마시는 동안 오빠가 '능력'으로 빨대를 식도로 넘겨버린다. 독재자는 호흡곤란으로 사망하고, 그 나라의 채굴권을 오빠가 획득하고 그걸 나에게 죄다 바친다면? 쓴웃음을 짓고, 오늘 하루도 그에게 정리의 단초조차 끄집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어둑한 골목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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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렉스 trex 2011.11.03 16:15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하루 인사라도 해요."


성큼 다가와서 건 첫마디가 저랬었다. 매일 눈에 띄던 사람이었다. 8번 출구를 나와 오르막길인 출근처를 향해 걷다보면 매일 지나치던 사람. 하긴 머쓱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지하철을 빠져나와 당도하기엔 횡단보도 2개는 좀 너무했다. 거리가 멀진 않았지만 고약한 도로였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라도 마주칠라치면, 매번 보는 얼굴이 분명하니 힐끗 상대의 옷차림을 점검하기에도 계면쩍고 아예 모르는 척 다른 일에 몰두하려 해도 마땅한 일이 없었던 터였다.


그러던 하루하루였는데, 오늘은 웬일로 내 편으로 갑자기 걸어와 말을 걸어오는 것이 저 첫마디였다. 웬일이라는 표현도 쑥스럽다. 서로에게 말을 걸 일 자체가 예상범주에 있지도 않았다. 따지고보면 서로 철저한 타인이니까. 사실 모른체해도 아무 이상할 일이 없을 사이 아닌가. 의식적인 무관심과 모른 체는 오히려 상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한쪽에서 그 상식의 저울을 한쪽으로 눌러 다가왔다.


못내 반가웠다라고 적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실은 그이 외에도 숱한 사람들과 매일 오전 지나쳤을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말을 건네는 하루의 파격을 감행한 그이가 반가웠다. 의식해 왔던게지. 횡단보도 저편의 그이를 보고, 짧은 일일 평가를 하던 나였다.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뭘 챙기는 것일까, 여자들은 왜 야상 차림을 좋아하는걸까, 음악은 안 듣는 모양이지, 방금 나를 잠시 봤다.


 



서로를 의식할 바엔 그이는 이 방법을 택한 모양이다. 미심쩍고 다소 불편한 의식이 있어온 오전을 화평하게 보내는 방법. 그 시도와 용기에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정작 인사는커녕 합죽이가 되어 '하루 인사'라는 낯선 조어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신속한 머릿속 계산만이 오갔다. 잠시 감탄을 머금고 말이다. 가까이보니 무방비로 드러난 기미와 주근깨의 배열이 백색 바탕의 은하계 같다. 그녀는 미인이었다.


"어떡하긴요. 지나칠 때마다 안녕하세요? 힘내요!나... 수고해요 이런 인사를 하는거죠."


거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새로운 고민만 말풍선을 키웠다. 앞으로 매일 건네야 할 인사는 천편일률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이의 하루 심리를 지배할만치 시의적절하고 정제된 적합한 언어여야 할 것. 한계는 명확하다. 난 그이가 뭘하는 사람인지 아직 알 도리가 없고, 될 수 있으면 그 정보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이 없다. 내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성격임은 알지만 그 또한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나의 인사는 디자인 시안 꼭 통과되세요!라는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잘 할거에요!의 형식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짧은 합의를 마치고 나는 내 방향대로 그이는 그이의 방향대로 서로 걸어갔다. 좀더 좋은 전망의 하루를 보장받은 것이다. 4시간 뒤 파견 근무 대상자로 지정된 것임을 알 때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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