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 (9)
Rexism : 렉시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이 있다. 내가 다짐한 일은 이 간략한 정의를 '있었다'라는 과거형으로 명명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렇다. 이걸 남 사정 모르는 이들은 손쉽게 '남자 친구 걷어차기'라고 호명하더라. 그래 암튼 내가 오늘 그걸 하려고, 이 매정한 다짐을 최근 며칠간 고민했고 나의 결론은 한결같았다. 더 이상은 못 견딜 일이고, 어떻게 이해할 일일지는 난 모르나 저 판단이 맞다고 여긴다. 나는 이 연인 관계를 정리하고, 상대를 걷어찰 것이다. 이런 나만의 다짐과 사정을 아는 소수의 몇명이 말하더라. 도대체 무슨 큰 문제냐고-. 남자 친구가 테레그램을 통해 미성년 성착취에 가담해 결제액 보내고 이런 범죄에 가담하는, 천인공노할 죄를 진 것도 아니고... 앞으로 정혼을 앞두는 시점에 시댁 될 사람들이 하자가 있..
쓸모없는 정보의 집산 같은 두툼한 지갑 안엔 아직 식권이 5장 남아 있었다. 오늘도 식당 안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하얀 접시를 들고 옹기종기 움직이며 각 코너를 면밀히 탐색 중이었다. 그들은 간혹 신랑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신부의 외모에 대해 실상 필요없는 힐난을, 세속적인 주례 진행으로 일관한 성당 신부님에 대해서는 뒷담화를 하긴 했지만 진지하진 않았다. 하지만 식당 안의 공기만큼은 달랐다. 건강진단서 종이짝이 주는 무게감을 상기하듯 보다 균형 잡힌, 허나 주말 안에 허락된 일말의 소중함을 상기하듯 절묘하게 기름진 각자의 접시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릇 결혼식 이후의 뷔페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게 2달 전 일이다. 나이 36에 일찍이 돌아가신 부친 덕에 홀로 남은 모친과 단둘이 사는 형편에 아직..
협상은 불발이 되었다. 독립해방군 대표와 평화탈환연맹 임시 대표의 만남은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잠시간 민중들의 희망을 품게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게 원점이 되었다. 이런저런 협상을 제외하고서라도 당장에 밀양시 가곡동의 구 KT&G 지하에 있는 로봇 군단의 동기화 서버 몇 대라도 박살을 내는데 합의를 봤어야 했다. 한 팔에 유탄을 장착하고 나머지 한 팔에 공구용 드릴을 장착한 Q1022는 효과적인 살상 병기였다. 이들의 전투 행동양식 모듈을 동기화 패치 하는 곳은 첩보대로 밀양의 서버들이었다. 청도는 물론, 경산까지 올라오는 Q1022들 덕에 의기양양하던 대구 진영은 근래 자주 불안감을 표시했다. 독립해방군 대표와 평화탈환연맹 임시 대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주된 이유는 두 단체의 명칭 때문이었다...
경애가 춤추는 아이를 만난다고 말을 털어놓은 것은 카페에서 자리를 정한지 13분여 후 남짓이었다. 이번에는 13살 차이라고 했다. 경애 자신이든 우리든 하얗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피부를 가진 경애의 유리한 조건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바텐더, ROTC 장교 아이, 음악하는 애, 그냥 잠자리만 잘하는 노는 아이 등 경애의 연애사에서 +1 하나 더 붙는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문제는 경애의 등이었다. 경애가 엉겁결과 의도된 시나리오 사이의 잠자리를 마친 후, 남자의 데워진 손길이 등을 타는 순간을 즐기는 것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경애가 젊음이라는 가치에 천착하게 된 것은 얼마전부터의 일이었다. 지도 교수의 바삭 마른 고목 결 같은 손길이 위안보다는 측은을 낳게 하고, 서로간의 사려가 ..
"SWOT 분석을 먼저 해봐. 곧 우리 물건이 군납 입찰 들어가거든. 경쟁사 대비 경쟁력이 있을지 없을지 한번 타당성을 따져보라구. 대리지만 과장급의 시선으로 한번 만들어 보라고." 파견 배치 후 가장 먼저 받은 업무 지시는 이런 것이었다. 업무지만 사실상 업무가 아닌 것, 뭘 시켜야할지 상대에 대한 파악이 도무지 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시키는 일. 뻔한 노릇이다. 장팀장님과는 일면식도 없었고, 첫 인사 이후부터 서먹했고 뭔가 서로간의 아귀가 맞아 들어갈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다소 난감하다. 기획자라는 포지션은 같았지만, 서로 일하던 필드가 애시당초 달라 어법이 다르고 문서 양식이 달랐다. 서로간의 이해에 의해 맞춰가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려 보였다. SWOT 분석이라는 업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
첫번째 '로봇 살인 사건'의 주인공은 세양일렉트로닉에서 나온 Q49 모델이었다. 세양일렉트로닉은 7월 9일 3번째 펌웨어 업데이트를 공지한 후, 자동으로 실행하고 개선 효과를 고객들에게 공지한 터였다. 사건은 7월 28일 중구 회현동 모처에서 발생하였다. 피해자는 39세 김**씨. 동물보호협회 소속 외엔 일정한 직업이나 수입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경찰은 덴마크에 거주중인 가족들이 지난 14년간 지속적인 입금을 해줬음을 밝혔다. 세양일렉트로닉은 사건이 펌웨어 업데이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유사한 형태의 오류는 다른 구매자들에게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신속히 밝혔다. 시중에 판매된 것으로 추산되는 Q49 모델의 대수는 총 4,508대. 로봇 부품 하청업체에서 창업 9년만에 독립 모델을 첫 ..
솔 담배가 마지막 한 가치만을 남겨두고 입술과 공기 사이에서 사라졌다. DJ는 속절없이 임지훈의 '사랑의 썰물'을 연거푸 재생할 뿐이다. "오늘 저희 업장에 오신 소중한 손님 손님 한 분이 유독 많이들 신청하고 계시네요~." 어지러운 나의 지글거리는 뇌 속은 LP 잡음을 뚫고 유려하게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을 재생하고 있건만. 아 여자 련아. 사람 속 태우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토록 한 줌 재 남길 새도 없이 한번에 화르륵 태우고 가는 것이냐. 장사에는 상도가 있다고 하지만 연정의 문제엔 도덕도 윤리도 없는 모양이다. 박정한 사람 속내 간의 전장이다. 련은 국민학교 교사였다. 재잘거리는 것들이 또래 보다 수풀 속 새들이 더 많은 섬동네여서, 이렇게 살다간 말라붙어 거무퉤퉤해지는 사과껍질 같은 인생..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오빠의 호언장담이 맞았다. 오빠가 말한대로 핸드폰은 오빠의 배 위에서 어떤 지지대나 줄도 없이 홀로 두둥실 떠올랐다. 몇초간 떠 있다가 바닥에 떨어지며 뒹굴기는커녕 제법 몇분간 떠있다가, 오빠의 심호흡 후 스물스물 손바닥 위에 내려왔다. 어린 시절 유리겔라의 숟가락 초능력 이후 - 몇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이 사기라고 했다 - 가장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게다가 TV 화상도 아닌 내 눈 앞에서 바로. 그것도 오빠가. 오빠의 미소가 환했다. 오빠의 실행은 이어졌다. 머그컵, 컴퓨터 하드, 칫솔, 핸드크림통 등이 아까 핸드폰처럼 오빠의 배 위에서 흔들흔들 떠올랐다. 오빠는 난처함도 동시에 표했다. 이게 전부고 이게 한계라고. 이걸로 딱히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