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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물, 대리만족을 넘어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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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물, 대리만족을 넘어서.

trex 2011. 5. 30. 10:43

+ 한겨레 웹진 HOOK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28073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

     매해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들이 공습 수준으로 몰려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중 미국의 코믹스(만화책) 원작의 슈퍼히어로물들은 이제 하나의 주류로 부상한지 오래다. 올해는 [토르]를 필두로 초여름 내내 [그린 랜턴 : 반지의 선택],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 [퍼스트 어벤저 : 캡틴 아메리카]까지 라인업이 득시글하다. 유독 올해가 슈퍼히어로물이 강세인 듯 하지만 이런 현상은 향후 몇년간 더 이어질 듯 하다. 제작이나 기획 소식이 들려오는 작품들만 하더라도 [배트맨] 신작, [스파이더맨] 신작, [슈퍼맨] 신작, [루크 케이지], [데어 데블], [데드풀] 등 셀 수 없을 정도며 개봉 년도를 일치감치 잡은 작품도 있다. 이쪽 세계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겐 다소 아연한 일이다. ‘맨’이라고는 수퍼맨과 배트맨 밖에 모르던 사람들에게 그린 랜턴은 뭐하는 녀석이고, 매그니토는 누구란 말인가.

     여름 극장가에서 보다 많은 관객들을 끌어모아야 할 사명감으로 가득찬 숱한 ‘맨’들은 사실 인지도로 보자면 우리네 ‘영구’ 보다 한참 달린다. 그들은 부족한 이름값 대신 파상공세를 펼치는 자본의 힘을 믿으며, 화려한 폭발 장면과 액션씬, 지구와 천체를 오가는 휘황찬란한 구경거리를 선사한다. 관객들은 일반 관람비 보다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3D 아이맥스니 4D니 하며 여름날의 극장 휴양을 즐긴다. 스크린 안에서 ‘맨’들은 눈과 광선에서 광선을 뿜고, 악당은 엔딩 크레딧이 흐르기 전후에 후일(속편 등장)을 다짐한다. 언뜻 공허해 보이는 이야기들에 익숙한 구조의 반복이지만 그때마다 관객들은 몰린다. 부족한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봄날 일치감치 개봉한 [토르] 역시 한국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기고 후일을 기약했다.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은 80년대를 기점으로 한 ‘매니아 키드’들이 성장함에 따라 여름 슈퍼 히어로물들이 통과 절차가 되었다. [G.I. Joe](지 아이 조) 같은 완구류와 TV ‘특선 만화’, 대여용 ‘비디오’ 타이틀들로 취향이 형성된 당시의 꼬마들은, 이제 성인 관객이 되어 극장가를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들에게 [토르]는 단순히 ‘토르’라는 ‘맨’이 활약하는 영화가 아니라 수년 뒤 개봉할 [어벤저스]에서 활약할 등장인물 중 하나라는 일종의 ‘계보론’이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다.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가 몇년 전 개봉했던 [엑스맨], [엑스맨2]의 앞에 있었던 역사를 다룬 영화라는 상식도 갖추고 있으며, [퍼스트 어벤저 : 캡틴 아메리카]에서 다루는 ‘슈퍼 솔저 프로젝트’와 ‘코스믹 큐브’가 여타의 작품의 요소들에 연결되어 있음도 알고 있다. 일반 관객들도 슈퍼 히어로물들을 즐기는 데엔 큰 무리는 없지만, 이들 매니아 키드 출신 성인들은 영화 속의 숨겨진 배경 지식을 알아보고 자기들만의 즐거움을 향유한다.

    그래서 문득 지금 이 시점에서 묻는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올 숱한 슈퍼히어로물의 행렬은 어떤 의미일까. 이들이 우리 관객들에게 호의적인 환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토에서야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거릴 발굴해야 하는 헐리우드의 고민이 반영된 것이다 치더라도, 우리에게 모든 ‘맨’들은 익숙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여름 극장가의 이름이 된 것일까. 슈퍼히어로물들에 고양되는 심리를 설명할 때 제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대리만족감’이다. 우리가 처한 불합리하고 뒤틀린 현실에 뛰어든 등장인물의 영웅, 그의 영웅적 면모로 모든 것을 초극할 때 관객들은 박수를 친다. 하지만 설명이 쉬운만큼 ‘대리만족감’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맨] 시리즈 2편과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그동안 한국 관객들에게 거리감이 있었던 슈퍼 히어로물을 친근한 자리에 올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작품이 이룬 성과가 없었다면 아마도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가 이룬 성취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전까지 한국 관객들에게 있어 배트맨이란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가 안겨준 괴팍한 인상이나, 조엘 슈마허의 공허한 시력 훼손 정도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는 슈퍼 히어로물이 단순한 여름 블럭버스터가 아닌 영화 자체로의 품격있는 구경거리가 될 수 있임을 인식시켰다. 그 전후로 출판가의 주류는 되진 못했지만 매니아 시장을 공략하는 그래픽 노블 출판물이 잇따라 나왔음도 주지할만 하다. 현재도 [배트맨 : 킬링 조크](세미콜론 출간), [슈퍼맨 : 레드 선](시공사 출간) 등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상당수의 우수한 그래픽 노블들은 영화판의 슈퍼히어로물을 만든 극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도 엄연한 사실이다.

     슈퍼히어로라는 낯선 이물의 존재가 현실적 공간에 뛰어들었을 때, 이질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매니아와 일반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듯 하다. 영미권 그래픽 노블의 걸작인 [왓치맨]이 이룬 성숙의 지표가 훗날 타 작품에 끼친 영향이나, 90년대를 전후로 익히 알려진 코믹스 작품들이 대안적 줄거리를 모색할 때부터 이런 분위기는 진작에 형성된 듯 하다. 이제 우리는 그 징표를 극장가에서 하나둘 확인하는 셈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다크 나이트] 안에서 방향성 없이 치닫는 9.11 테러 이후의 정신적 상혼을 확인했고, [킥 애스] 안에서 현실 안 영웅놀음이 야기하는 파국적 폭력을 대책없이 관음하게 되었다. 대책없는 놀이거리에서 슈퍼히어로물들은 문득 우리 시대의 근심을 토로하는 이야기거리가 된 셈이다. 비교적 오락성이 짙었던 [아이언맨]에서조차도 미국 군수산업의 흐릿한 그림자가 자리했다. [아이언맨]애서의 토니 스타크는 쿨한 ‘로드 오브 워’였지만, 그의 손바닥 광선이 한반도의 북쪽 편을 향하지 마란 법도 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 환경에 대한 불신과 경제 불균형이 팽배한 이 땅에서 슈퍼히어로물의 환상은 도취되기 쉬운 유혹일수도 있다. 이런 시점에서 도취된 상상력과 대리만족감의 물신이 합쳐지면, 80년대 하드바디 액션 영화들의 인상에 가까워질 듯한 두려움도 있는게 사실이다. 슈퍼히어로물에 겹치는 람보와 코만도의 인상이라니. 오 이런… 그런 것은 원치 않는다. 개봉을 앞둔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의 배경이 1960년대의 냉전 시대라는 말을 듣고 이런 걱정이 문득 들었다. 정신적 유산으로 계승(?)받은 냉전 시대의 뇌세포만으로도 묵직할 지경인데, 지방 도시 바닥에 매립된 고엽제라는 냉전 시대의 물질적 유산까지 덮치는 판국이라 더욱 그러하다. [1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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