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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뭐라칸다/창의극장

보고서를 쓸 시간이 아니었다.

trex 2012. 3. 20. 15:24
"SWOT 분석을 먼저 해봐. 곧 우리 물건이 군납 입찰 들어가거든. 경쟁사 대비 경쟁력이 있을지 없을지 한번 타당성을 따져보라구. 대리지만 과장급의 시선으로 한번 만들어 보라고."


파견 배치 후 가장 먼저 받은 업무 지시는 이런 것이었다. 업무지만 사실상 업무가 아닌 것, 뭘 시켜야할지 상대에 대한 파악이 도무지 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시키는 일. 뻔한 노릇이다. 장팀장님과는 일면식도 없었고, 첫 인사 이후부터 서먹했고 뭔가 서로간의 아귀가 맞아 들어갈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다소 난감하다. 기획자라는 포지션은 같았지만, 서로 일하던 필드가 애시당초 달라 어법이 다르고 문서 양식이 달랐다. 서로간의 이해에 의해 맞춰가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려 보였다.


SWOT 분석이라는 업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찰이라고는 하지만, 실상 우리가 군납을 맡을 것은 본사에서 귀뜸만 들어도 확실한 사실이었다. 지금 경쟁력 분석하고 경쟁사 비교할 시간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입찰 후의 움직임을 생각해야 할 시점에 대리급이라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일을 던져주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팀장님의 의견은 개인 업무 능력 향상이라는 명분인 모양이다.(이마저도 장팀장님 본인에게 들은게 아니라, 건너서 들은 표현이다) 글쎄요. 전 이런게 지금 필요한게 아니고 제가 왜 파견되었는지 근본적인 이유부터 알고 싶네요.


무엇보다, 그 어떤 결정적인 무엇보다 일이 하기 싫었다. 워낙 벼락같은 파견 명령이었고 이틀만에 바로 대전에 내려와야했다. R&D 연구소 내에 있는 사원 숙소에서 모든걸 해결할 수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게 서울에 남겨둔 개인적 사정까지 깨끗이 정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모든 과정은 황급했고 갑작스러웠다. 몸과 마음의 잉여물을 서울 군데군데에 잔뜩 묻어온 기분이었고 여기에 포스트잇처럼 부착할 수 있는 마음의 잔정은 여간해서 싹을 트지 않았다. PPT 문서는 여기서부터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별 의미도 없는 언어를 뱉어낼 힘조차 들지 않았다.


 

커서 부근은 깜빡거리고 있지만 모니터 저편의 '횡단보도 그녀'가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서 다소곳이 서있을 뿐이었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하루 인사라도 해요."


라는 첫마디의 울림이 식지도 않았는데, SWOT 분석이 웬말인가. 현재 시점에서의 그녀를 향한 나의 장점 단점 기회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싶을 뿐이었다. 단 몇초만에 이성을 짝짓기해주는 유틸리티가 즐비한 세상에 나는 기억력에 의존해 '횡단보도 그녀'의 잔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무슨 노릇인가 이게.


PPT창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을 듯 하여, 억지로나마 쾌청한 마음을 불어넣으며 포털의 뉴스란을 펼쳐보았다. '[속보] 국내 첫 로봇 살인 사건 발생.'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지금 우리 회사가 군납하려는 QME3의 민간형 프로토 모델 Q49에 관한 소식이었다. 본사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출퇴근한 제4 부설연구소가 왈칵 뒤집혔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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