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렉스 trex 2015.01.06 22:42

쓸모없는 정보의 집산 같은 두툼한 지갑 안엔 아직 식권이 5장 남아 있었다. 오늘도 식당 안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하얀 접시를 들고 옹기종기 움직이며 각 코너를 면밀히 탐색 중이었다. 그들은 간혹 신랑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신부의 외모에 대해 실상 필요없는 힐난을, 세속적인 주례 진행으로 일관한 성당 신부님에 대해서는 뒷담화를 하긴 했지만 진지하진 않았다. 하지만 식당 안의 공기만큼은 달랐다. 건강진단서 종이짝이 주는 무게감을 상기하듯 보다 균형 잡힌, 허나 주말 안에 허락된 일말의 소중함을 상기하듯 절묘하게 기름진 각자의 접시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릇 결혼식 이후의 뷔페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게 2달 전 일이다. 나이 36에 일찍이 돌아가신 부친 덕에 홀로 남은 모친과 단둘이 사는 형편에 아직 제대로 연애는커녕 "니 앞으로 혼자 살라카나? 우얄라꼬 저카는가 몰라."라는 푸념 섞인 질문에 매끈한 답변 하나 준비 못 하는 사정이라, 예의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부담스러웠던 차였다. 마침 축의금 코너에 사람 좋은 사촌 형님이 먼저 앉아 계시길래 그 일을 내가 자처했다. 친지 어르신들을 직격으로 대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신랑 신부 다음으로 바쁜 보직인지라 잔소리 회피에도 용이했고 정작 식이 시작되어도 배 아픈 광경에는 제외될 수 있다는 장점이 매력적이었다. 예상대로 작은아버지의 평소 산악회를 중심으로 한 인맥이 유효하게 작용하여 축의금 받고 계산하기 바쁜 1시간 55분여였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내 손에 남게 된 식권이 7장 정도 되었다.



성당에 다소 떨어진 부속건물의 식당이라는 점이 일차적으로 유리했고, 무엇보다 식권 뒤에 식별이 가능한 별도의 도장이 없다는 점이 이차적으로 유리했다. 그렇다. 내 손에 남게 된 식권 7장을 내 하루 일당인 양 셈하고, 앞으로도 간간히 써먹기로 한 것이었다. 이 정도 도발도 내겐 나름 1박 2일간의 고민이 소요되는 도발이었다. 사실 결혼식장 뷔페 음식 수준이야 김밥천국과 김씨네김밥 사이 수준의 줄타기이고, 만에 하나 발각되었을 때의 거대한 포말을 안으며 밀려오는 면구스러움 또한 각오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창조경제의 기치를 들고 열심히 파국의 불황으로 향하는 서민경제의 형국과 '그래도 공짜 식사인데!'라는 얄팍한 가계부 계산속이 나를 발걸음하게 만들었다. 



딱딱하다는 개념에 가까운 차가운 설탕 육회, 식어버린 찹쌀떡에 생선을 대충 올린듯한 초밥, 고무처럼 질긴 갈비짝, 무성의한 아이스크림의 마무리까지... 4,000원짜리 콩나물국밥만도 못한 메뉴들이거늘 지난번 무단 뷔페 이용 클리어 1회차에 나는 깨달았다. 난 이곳이 제법 맘에 든다는 사실이 말이다. 추가 구성의 바베큐 메뉴 때문은 아니었고, 이 적당한 싸구려 분위기와 식권 하나면 통과되는 분잡함 속의 익명성이 나의 주말을 적당히 때워줄 유희가 될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이것은 나름의 전략성도 구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성당이라고 수시로 식을 열리는 것은 아니었기에 계약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월별 길일에 찾아야 했고, 식을 마친 직후 사람들의 인파로 북적해지기 바로 직전의 한적한 시간대가 중요하였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4바퀴짜리 싸구려 성찬이 완료되는 셈이다. 나름 괜찮지 않은가?



생선튀김볼과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삶은 게 조각, 돼지고기 차슈 덩어리가 올라와 있는 2번째 접시를 막 비울 찰나였다. 폐백을 마치고 간략한 피로연의 절차를 밟은 오늘의 신랑 신부가 들어올 시간대였다. 인연 없는 인생들이지만 입장의 문턱이 낮은 성당 결혼식 뷔페로 인해 소중한 또 한 번의 기회를 부여한 이들이다. 그들을 위해 우물거리는 턱을 들며 눈으로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인연 없는 인생들이라는 내 짧은 정의를 박살 내며, 지각 능력은 그들이 내게 인연이 있던 이들임을 상기시켰다. 그 신랑 신부는 차명균과 신예희였다. 



짧게 광희가 서렸던 연애, 그 연애의 한 지점에서 벌어진 군입대라는 사건, "잘 부탁드려요"라는 진심의 인사를 건네며 한 사람을 믿었던 20대 후반의 초라한 순진함, 그 순진함이 야기한 대참사가 이뤄낸 이 행복한 결실, 이 광경을 내 의지와 내 눈으로 본의 아니게 목도하니 고깃살은 제대로 씹히지 못한 채로 식도를 넘어갔다. 3번째 접시는 아쉽게도 채워지지 못했고, 지갑 안의 남은 식권들은 남은 기회를 채우지 못할 운명이었다. 나는 황급히 빠져나가 인근의 카페에서 가장 쓰디쓴 커피를 파는 곳이 어디일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이 행진곡을 마무리 짓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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