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지산에서의 하루의 여운. 본문
작년 지산의 첫 출발에 적잖이 우려와 시큰둥을 느꼈던게 사실이었다. 인접성이 너무 안 좋았고 - 아마 페스티벌이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지명이었다 - 이 나라의 음악팬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불신을 지닌 나로선 대표급 페스티벌이 '두동강'이 나는게 좋은가 싶었다. 이런 나를 우습게 만들 정도로 음악팬들은 고무되었고, 열성적인 후기를 적었고 지산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그럼에도 올해 별 생각이 없었다. 여름 페스티벌은 체력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고른 숨을 요구했고, 라인업이 음악적으로는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다. 뮤지션별 무대 배정도 마땅찮았다.(이 팀이 이 날 이 무대 피날레라고? 뭐 장난해?) 그런데 누구의 제안 하나가 결정을 바꿀 때도 있는 법이다. 숨 고르기가 필요했다. 그래 가자. 이왕 가자면 합리적이고 즐겁게 가자고 맘 먹었다.
정신 가출한 금속탐지기 앞에서의 가방 검사가 소흘히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호두빵과 오징어, 초콜릿에 대한 시비를 걸기만 해봐라 벼르던 차였다. 병이나 캔으로 된 음료는 없냐고 물어본다. 주최측 입장에서는 여기서 사먹어야 할 맥주 대신 반입해오는 병/캔 음료가 폭발물 보다 더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이렇게 안 해도 행사 주최하는 케이블 채널이 너절한건 세상이 다 아는데 뭘 새삼. 페스티벌 현장에서 사먹는 맥주를 뮤지션에게 집어던지면 누가 책임질려나?
전국비둘기연합은 일전에 공연을 두어번 봤으니 놓쳐도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전체적인 현장을 살펴보려 - 아무튼 지산이라는 곳 자체가 처음이니 - 빅탑 스테이지에 들렸다. 구름에 가려진 햇볕이 그래도 위력을 새하얗게 발산하며 있었다. 좀 더웠고, 메이트의 무대야 앨범처럼 큰 감흥은 없었다.
타이완에 온 밴드 Matzka의 무대를 엿보려 그린 스테이지로 갔었다. 지나쳐 온 수영장엔 왜 언뉘들은 없고, 백인 남정네들만 우글우글.. 에라이. Matzka의 무대는 특기할만한 했다. 지역성과 장르 보편성의 적절한 배합이랄까.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밴드 같은 팀들이 떠올랐다. 우리도 저런 시도가 있는데, 본토에서는 전혀 장사가 안된다. 장르 보편성이나 트렌드를 압도하는 시도에 목매다는 풍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의 181818 욕설 코멘트로 객석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아폴로18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이번 욕설 멘트에서는 특히나 '지산 맥주 존나 비싸 시부렁'이 맘에 들었다. 30여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오후라는 시간대 때문에 역시나 'Red', 'Violet' 쪽 넘버보다 'Blue' 넘버로 가득 채웠다. 덕분에 고출력 아폴로18, 시종 일관 달구기에 여념이 없었다. 연주 하는 이도 듣는 이도 기차놀이 하는 이들도 땀이 흠뻑, 비로서 지산에 왔다는 기분 좋은 실감을 할 수 있었다. FTL을 한번 더 불렀는데 이유는 김바다의 등장 덕분, Crazy For Crash라는 타이틀 아래 묶인 기획이라 사전에 논의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바다의 거친 보컬과 막판에 마저 숨통 끊자 정신으로 무장한 아폴로18의 연주가 만나니 이것도 지산의 특권인가 싶다.
스태프 출입석 부근에 앉으니 아트 오브 파티스의 기타 박주영씨, 김바다, 옷 갈아입은 아폴로의 현석씨가 왔다갔다 ㅎㅎ 그 다음 무대는 피아, 사운드 체크 시간에도 영 흡족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는지 진행 초중반까지 사운드가 덜컹거리면서 고충을 토로하였다. 1집과 2집 애호 쪽인 나로선 '소용돌이'가 상당히 반가웠다. 밴드의 이력상 전자 사운드가 한층 강조된 요즘이라 그쪽의 넘버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기본 기조는 헤비니스라(그리고 역시나 인지도상?) 객석의 가투가 상당히 볼만했다. 사운드는 여러모로 당사자들이 속상했겠지만.
아트 오브 파티스는 앨범 발매 직후 시점이라 처음이었다. 스태프 출입구를 오갈 때 박주영씨는 머리를 질끈 묶은 상태였지만 무대에선 자유롭게 풀어헤친... 김바다도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상의는 하얀색, 하의는 검은색으로 맞춰입고 'Recover'를 필두로, 'Art of Parties' 등의 넘버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층 사람들이 빠져나가 좀 슬펐고, 나 역시 이내 자리를 떠야할 입장이었다. 예상대로 이번에는 아폴로의 현석씨가 반대로 아트 오브 파티스의 기타를 네번째 곡에서부터 거들기 시작했다. 이틀 후에 알았지만 이 날 마지막 넘버로 '첫사랑'도 불렀다고 흑.
다시 돌아온 빅탑 스테이지. 장기하의 무대였다. 일행과 난 장기하 무대를 실제로 본다. 크게 두가지를 느꼈다. (1) 이 자리에 발표한 신곡 덕에 내가 장기하를 1집이던 2집이던 그의 음악을 별로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고, (2) 그럼에도 굉장히 매끈하고 능숙한 무대 매너를 지녔다는 점이었다. '미미 시스터스' 대신 '목젖들'을 대동한 무대에 '저희가 오늘이 설날이나 마찬가지에요. 올해 공연을 한번도 안 했는데...' 같은 멘트는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호감이든 재미를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정 시간을 오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다.
올해의 락페스트는 오뽜들은 '웃통', 언뉘들은 '다리'가 코드인 듯. 오뽜들의 웃통이 근사하지 않아도 이해가 가는 것이, 저렇게 한번 벗으면 다시 옷이라는 거죽을 뒤집어 입기가 싫어진다. 미학적으로는 언뉘들의 '다리'보다는 떨어지지만 이런 사정이 있으니 내년에도 관대히 봐주시길. 뭘 처먹으라는건지 알 수 없는 똥같은 메뉴를 파는 주최측과 입점 매장보다야 귀엽지 않은가. 그런데 아이폰 쓰는 인간들 뭐 이렇게 많어.
이어지는 빅탑 스테이지, 이제 언니네 이발관 공연은 멘트에 대한 예상치가 있다. 그 예상치를 안 벗어나는 이석원을 보는 재미와 안스러움의 공존. 그리고 그의 불명예스러운 보컬 상태와 '어제 만난 슈팅스타'가 주는 희열 간의 위태로운 공존, 그리고 위태로움을 붙잡은 훌륭한 이능룡의 성장.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의 떼창이 감동스럽다고 했지만, 이 날 보다 훨씬 감동적인 떼창을 경험한 나로서는 언니네 이발관의 이 아슬아슬한 무대가 주는 묘한 감정은 어떤 의미에선 좀 씁쓸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픽셀의 집합체 같기도 했고, 핑크 플로이드의 Wall의 새로운 버전 같기도 한 그런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물론 나는 Pet Shop Boys의 무대에 대한 이야길 하고 있으며, 사실 공연이 준 기대 이상의 환희를 제대로 표현할 준비나 능력치가 없음을 미리 실토해야 겠다. 한가지 위안이 있다면 지금 웹엔 이것에 대한 훌륭한 후기들이 있다는 점? Pet Shop Boys는 2일차 지산을 택한 주효한 이유이면서도, 사실 가장 큰 우려점이기도 했다. 과연 무대가 제대로 재현될 수 있을까?
박스는 같은 통로를 걸어야 하는 획일적인 사람들에 대한 메타포이면서도, 그 형형색색의 면모 가 다양성에 바치는 찬사 같기도 했다. 닐 테넌트는 중후한 신사 같은 위엄과 키치 자체를 껴안은 중년 신의 모습을 오가며 성실한 무대를 운영했다. 박스를 뒤집어쓴 채 춤을 추는 댄서들과 거대한 픽셀 단위의 색채를 발광하는 무대와 허물어지는 뒷 편의 박스, 새로운 영상들.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이 펼쳐지며 'Heart', 'Go West', 'New York City Boy', 'Always on My Mind'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매혹의 림보!
'Jealousy'가 흐르며 뒷편에서 자기파괴적인 연애의 춤을 추는 댄서,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 그 자체, 'Viva La Vida'의 왕의 복장, 급기야 'It's a Sin'에서의 부유하는 박스와 떼창들 같은 기적의 순간을 어찌 잊겠는가. NIN 공연을 봤을 때 'Hurt'와 'Head Like a Hole'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렇게 각인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꼭 생기게 마련이다. 앵콜로 다시 등장 후 'Being Boring', 'West End Girls'로 마무리된 90여분의 순간이 결국 이 날 지산의 최고가 되었다.
집이 먼 이들은 남은 페스티벌을 즐길 여유가 없다. 조금 서두는게 운영에 문제가 있는 페스티벌에서 덜 엿을 먹는 방법 중 하나다. 페스티벌이 어느덧 과거지사가 되었다면, 돌아가는 시간에 그 여운과 후일담을 동행과 나누는 것이 지속의 방법이기도 해다. 흥분은 지속된다. 셔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저편엔 한 청년이 펫샵에서의 무대에서 받은 하얀 박스를 들고 가고 있었다.
[1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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