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또는 진실에 대하여 본문
얼마전 지인분의 권유로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스티브 와인버그 저 | 신윤주, 이호은 옮김 / 생각비행 출판)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권유가 담고 있는 호의와 별개로 두툼한 책의 두께가 나를 두렵게 하기는 했지만,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었다, 부제가 근사하다. ‘어떻게 한 명의 저널리스트가 독점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렸나.’ 금세기에는 분명 보기드문 광경이다. 우리에게 지금 저널리즘과 내부고발은 한갓 이슈는 되나 세상 자체를 바꾸기엔 무력한 시위 같은 이미지이다. 물론 이 무기력함에 대한 관성은 내 자신, 또는 우리의 문제다. 그걸 딛는 순간의 다짐과 손목에 들어간 힘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본저는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1857~1944)이 미국의 거대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록펠러(1839~1937)의 기업 스탠더드 오일의 실체를 밝혀낸 이력과 말년까지의 기록을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의 초반 재미의 상당수는 철도가 놓여진 황량한 초원 위에서 자신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던 사람들이 석유를 발견하고 난 뒤부터 시작된다. 남북전쟁으로 대표되는 미국 근대사의 상혼이 사람들 마음 속 곳곳에 남아있던 당시, 농경지들은 석유산업의 새로운 기운으로 갈아 엎어지고 도시들은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들뜬 기운이 책 초반에 독자들에게 제법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새롭게 발견한 석유를 어떻게 다룰지 몰랐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사고로 인해 강물에 석유가 유출되자 동네 아이들이 물통으로 기름을 걸러내며 어른들에게 팔고, 돈벌이를 발견한 자본주의자들이 철도와 정부와 협상하며 재빠르게 움직이던 미국 근현대사의 풍경들이 시작된다.
이 와중에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자신의 성실한 방식대로 기업가로서 차근차근히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 책의 초중반부는 마치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를 닮아있어 두 주인공의 각기 다른 행보를 시시각각 전달한다. 인생의 황혼기까지 좀체 정면에서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은 저널리즘과 기업윤리의 영역에서 (링 무대 대신)책 후반에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가정에 불성실하고 부도덕했던 아버지와 달리 종교의 말씀에 귀 기울이던 록펠러는 성실함과 기민함으로 착실하게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사실상 세상의 모든 성공한 기업가들은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자신의 내외부에 있던 확장과 욕망의 목소리를 정당화하고 올바른 윤리라고 믿으며… 이러다 기업 스탠더드 오일은 정상적인 기업이 아니라 독점과 트러스트라는 이름으로 독립업자와 영세업자들의 숨통을 죄는 존재로 변질되어 갔다.
록펠러의 형편과 달리 석유 독립업자 가족을 둔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희망과 경제성장 이면의 그림자를 동시에 교차하며 경험했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의 여학생들과 다른 곧은 자의식도 그녀의 훗날 행보를 예감케하는 구석이 있었고, 오래가지 못한 주일교사 경험과 저널리즘에 대한 천착은 곧바로 프랑스 유학으로 이어진다. 세속적인 연애 사건 보다는 몇몇 흐릿한 성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이 가는 루머들이 오가긴 했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그보다 중요한 대목은 귀국 후 열린 본격적인 저널리스트로서의 행보다. 의욕적인 발행인 새뮤얼 시드니 매클루어의 도움으로 [매클루어 매거진]의 간판 기자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나폴레옹], [롤랑 부인(잔 마리 플리퐁)], 그리고 [링컨]에 이르는 전기 기사들을 거침없이 내기에 이른다. 대상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해와 풍부한 자료 조사, 인터뷰 등을 원칙으로 소명감으로 일관된 자세를 잃지 않는다. 객관화에 대한 견지와 인간적인 시선 사이가 교차하는 덕에 상반된 평가를 얻기도 했지만, 이런 자세는 1902년부터 시작된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에 대한 고발 기사 시리즈에도 이어진다.
(전략)그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점령지를 빼앗고, 주민의 미래를 잠식했다. 급작스런 공격으로 사업이 흔들리자 독립 사업자들은 힘을 잃어버렸고, 그 마을에서 유지되던 공명정대한 정신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지역 전체에서 미국 상업 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큰 반란이 시작되었다. (P. 352)
역사적인 이 기사 서문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고발 기사들은 스탠더드 오일로 대표되는 거대 석유기업의 독과점을 해체하는데 일조를 한다. 필력이 자본주의의 완강함을 이긴 얼마 안되는 예시 중 하나일수도 있겠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변화가 꼭 세상을 올바르게 자리잡게 한 것은 아니었다. 독실한 침례교에 대한 신념과 기부로 인해, 자신이 옳다고 여긴 록펠러는 ‘아마도’ 말년까지 타벨의 기사를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고, 트러스트는 해체 되었지만 나눠진 기업들은 오히려 말년의 록펠러에게 성실히 지급되는 영생의 부를 기약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타벨에게 부여된 ‘최초의 현대적 탐사보도 기자’라는 타이틀은 소중하다. 진실에 닿으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가치가 있고, 이렇게 역사의 궤를 움직인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문득 현재의 대한민국을 상기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던 태안 바다의 기름띠와 내부고발자의 불운한 운명, 화사한 어법의 마케팅으로 가족과 화합을 이야기하는 대기업들의 이면들, 무엇보다 우리 주변의 저널리즘의 앙상한 몰골들. 그럼에도 활기를 띄며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차륜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비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다시금 숱한 이들의 손목 힘이 필요한 때임을 자각하게 된다. 진실이 저기 있을진대, 애써 돌아보지 않고 아스팔트 위를 체념하게 걷는 오늘 하루에도 새삼. [1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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