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만국의 오덕들이여, 단결보다 일단 먼저. 본문

책줄읽고로그남김

만국의 오덕들이여, 단결보다 일단 먼저.

trex 2010. 10. 11. 13:50

+ 한겨레 웹진 HOOK에 실렸습니다. 포스팅 제목이 제출시 원제였고... 실제 실렸을 때는 [만국의 오덕들이여, 즐겁게 살아보자]로 조정 되었습니다^^) : http://hook.hani.co.kr/blog/archives/13758


최근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의 [홋카이도 보통열차]와 자유기고가 남명희의 [미치도록 드라마틱한 세계, 미드]였는데, 한달 간격으로 각각 출간된 이 책들의 공통점이란 실상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한 공간에 별도로 소개하는 이유는 어떤 반가움 덕이다. 독서 순서에 의해 [미치도록 드라마틱한 세계, 미드]부터 살펴본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시청자라는 이름의 대중세력과 제작진 간의 흥미로운 긴장감으로 가득 찬 미국드라마의 세계와 키워드 별 분석으로 이뤄졌다. 반가운 대목은 저자 남명희가 책의 프롤로그에서 마니아선언 대신 오덕/덕후인증을 하며 매듭을 짓는 부분이었다. 참고로 오덕/덕후라는 단어는 일본어 오타쿠가 한반도의 웹 공간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편이성의 이유로 흥미롭게 변이한 것이라고 해두자.

 

    오지은의 [홋카이도 보통열차] 역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저자가 오덕/덕후인증을 하는 부분이 첫번째 챕터에 나온다. 여행 계획을 수립하는 방법론을 설파하다, 버스나 지하철을 탄다고 버스 덕후, 지하철 덕후라고 표현하지 않으니 기차 여행을 평범히 즐기는 자신을 철도 덕후라고 부르는 것은 억울한 구석이 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자신의 몇몇 여행기 쓰레드가 []이라는 이름으로 웹 공간에 허다하게 퍼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OTL 포즈라도 취할 기세로?)급기야 좌절 후 자신의 철도 덕후 낙인(!)을 수긍하기에 이른다. 오지은은 남명희처럼 오덕/덕후마니아중 한쪽의 호칭에 대한 적극적인 호오를 드러내진 않지만, 대신 자신의 지식과 재능, 즉 오덕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다짐에 이른다. 오 은혜로운지고.

 

    선언과 자기긍정들, 이 모든 것들을 그렇게 거창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오덕/덕후라는 말 자체가 심각한 함의를 얻은 단어라기보다 가벼운 자기혐오와 소심한 수긍이 깃든 단어인 덕이다.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오타쿠라는 단어는 타인을 향해 호명할 때 사려심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공격적 지칭이기는 하다. 그런데 오덕/덕후는 오타쿠라는 단어와 거의 흡사한 뜻이면서도(당연하겠지만), 뉘앙스는 한결 가벼워져 공격성은 내재되었으나 받아들이는 이의 충격도는 낮은 편이다. 그만큼 사용빈도가 높아져 원래의 의미에서 다소 틈새가 벌어졌달까. 물론 오덕/덕후는 여전히 자기체념의 기운은 물론, 동류혐오의 기운까지 담긴 단어이기도 하다. 타인이 나를 전문가라고 불러주는 것은 황송한 일이지만 넌 오덕이야!’라고 부를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반응은 한정적이고 뻔한 것이다. 광속으로 손사레를 치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차가운 이성으로 방어하기에도 바쁠 것이다.

 

    남명희와 오지은의 책을 두고 반가웠던 이유는 자명하다. 웹 공간에서 남발된 나머지 매니아오타쿠라는 본래의 함의에서 멀어진 채, 온갖 속어 속에 숨어든 오덕과 덕후라는 단어가 힘을 얻고 우뚝 선 덕이다. 그것도 타인을 공격하기 위함도 아니고, 움츠린 태도도 아닌 건강한 자기긍정성이라니! 남명희의 말을 요약하여 인용하자면 은 매우 광범위하고, ‘마니아는 좀 젠체하는 느낌을 받는다면, 오덕/덕후는 모두를 다 위아래 없이 평준화하는 인상이 강한 것 때문이란다. 하긴 그랬다. 웹의 수많은 그들은 취향을 공유하면서, 때론 서로간에 전문성의 경쟁을 펼치기도 했고, 하늘의 별이라 여겼던 학자와 연예인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맞먹기도 한 것이다. 이제 세상의 몇몇 영상 감독들은 언뜻 헐거워 보이는 구조를 가진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자신을 애호하는 오덕과 덕후들이 구멍 난 구조와 설정들을 채워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팬덤이란 존재는 원전의 곁가지를 무서운 기세로 뻗어 팬픽과 세계관의 확장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런 일들엔 언제나 서슬 퍼런 양면성이 존재한다. 인더스트리얼 밴드 Nine Inch Nails의 수장 트렌트 레즈너는 팬들이 자신의 원전을 마음대로 갖고 놀도록 리믹스 음반의 2번째 디스크를 리믹스용 음원 소스로 제공했으며, remix.nin.com는 그 덕분에 Nine Inch Nails 오덕/덕후들의 신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한편에는 오덕/덕후들의 광범위한 정보 공유와 속도 전쟁이 야기한 연예인 사건 진실 파헤치기의 무시무시한 폭력성 또한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흔한 말로 과유불급의 교훈이 있지만, 오덕/덕후 문화 코드의 본질이야말로 무엇에 대한 지나친 천착이 아니던가. 평범하고 소심한 내 자신이자 내 주변의 이웃들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의 내재된 에너지와 간혹 제도를 초월하고 앞지르는 유희와 발산의 몇몇 순간은 간발의 차로 긍정에 손을 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재미를 느끼면 앞으로 빠삐놈의 경우처럼 원전이 어떠한 형태로 버전업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직도 웹을 부유하는 오지은의 ‘[] 일본 철도 일주처럼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닐 ‘[] 중언부언 지도층 에피소드.3’들의 탄생도 기대해봄직 하다. 물론 쉽지 않을 듯 하다. 당장에 정치 이야기가 잦다고 이맛살 찌푸리는 파닭애호가들이 득실한 한국 트위터의 사정도 그렇고, 정치성에 관해서는 제각각의 입장의 차이가 현명할 수 밖에 없는 사정도 그러하다. 그래도 당장에 만국의 오덕들이여, 단결하라고 촉구하기 보다는 즐겁게 잘 살아보자고 격려하고픈 마음이 크다. 잘 살기 위한 전제조건인 우리네 삶의 바탕들이 어떤 색으로 채색된 것인지는 한번쯤 분명 돌아봐야겠지만. [101010]



2010/09/25 - [책줄읽고로그남김] - 오지은 [홋카이도 보통열차]
2010/10/09 - [책줄읽고로그남김] - 남명희 [미치도록 드라마틱한 세계, 미드]

미치도록 드라마틱한 세계, 미드
국내도서>예술/대중문화
저자 : 남명희
출판 : 현실문화 201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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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보통열차
국내도서>여행
저자 : 오지은
출판 : 북노마드 201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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