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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xism : 렉시즘
변신 로봇의 쾌감과 절망. 본문
+ 한겨레 웹진 HOOK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30699
모든 남자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상당수에게 성장 과정에서의 로봇 만화 추억은 중요한 절차이다. (지금은 사양 사업이 되었지만)한참 때 비디오대여점은 아이들이 시리즈 순서대로 로봇 만화를 빌린다고 어머니에게 떼를 쓰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검은 봉지 안에 대여한 비디오테이프를 1~2개 담아 집으로 달려 들어가, 재생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나오는 ‘호환 마마’ 경고가 지나가면 익숙한 주제가가 나온다. 그렇게 지구의 – 또는 우주의 – 운명을 건 선과 악의 전쟁이 벌어지고, 반항적인 주인공은 박사님과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매회 등장하는 침략자 로봇과 괴물들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재생되는 것이다. 동생과 친구들과 함께 주먹을 쥐며 사활을 걸고 보던 이야기들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 흐릿하게 박제되고, 우리는 어느새 조카들의 로봇 장난감을 사줘야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요새 장난감들은 왜이리 비싸?”
로봇 만화의 정점 중 하나는 ‘변신 로봇’ 만화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차와 자동차, 오토바이, 심지어 공항의 항공기들까지 악의 기운이 느껴지면 그것들은 제각각 변신하거나 자기들끼리 합차하여 거대한 상태의 로봇이 된다. 지겨운 산수 숙제와 탐구생활 문제지, 선생님들의 매 타작이 있는 현실과 달리 그을린 빌딩숲 사이에 웅장한 육체를 뽐내며 노을을 바라보는 변신 로봇의 환상성은 매혹적이었다. 친구네 방 박스 안에 가득했던 유명한 장난감들이 못내 부러웠다. 그래도 얘는 이걸 가지고 놀기나하지, 난 고작해야 은하철도 999 모양의 작은 열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장난감이 딱 하나 있었다. 그거 하나 가지고도 지구와 달 사이를 오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이가 들자 새 모이만큼의 수입이 생기자, 굳어있다 이내 꿈틀대던 유년 시절의 상상력이 박차고 나온 모양이다. 로봇 프라모델 조립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사실 프라모델 조립 역시 비디오 대여만큼이나 당시의 우리에게도 있었던 소비 행위였다. 학교 주변 불량배에게 걸렸다는 거짓말을 하며, 틈틈이 모은 500원 동전으로 공작용 본드를 발라야 조립이 가능한 싸구려 프라모델을 사곤 했었다. 만화 속에 나오는 것만큼 근사한 포즈나 색감도 불가능했는데 ‘만들고 재현한다’는 행위는 만만찮은 즐거움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만지는 프라모델들은 새로운 세계였다. 소위 ‘어른의 소비’라는 표현답게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정밀도는 말할 나위 없이 정교해졌다. 프레임이라는 이름의 뼈대를 먼저 조립하고, 외형을 덧붙이니 예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완성도의 로봇들이 만들어졌다. 주로 건담이라고 불리는 브랜드의 로봇 프라모델들이 완성도가 출중하고, 사람들은 이걸 건담 + 프라모델의 줄임말로 ‘건프라’라고 부른다.
사실상 건프라들은 원작 만화 건담 시리즈의 특성상, 변신 로봇들의 비중은 약한 편이다.(변신 로봇 비슷한 것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대개의 건담 시리즈 만화들은 일일 연속극 등장인물과 호각을 다툴 정도의 감성의 두께를 지닌채, 전란 속의 인간 드라마에 치중한다. 로봇들의 활약도 있지만 건담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의 로봇 기체들은 ‘좀더 강력한 슈퍼 전투기’의 개념에 가깝다. 예전엔 이런 경향성이 주류를 이뤘으나 최근엔 90년대 이후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들의 영향 탓인지 건담이 ‘메신저’나 ‘인류 운명의 키’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건담 상품의 판권을 쥔 일본의 제작사 반다이의 역량과 작품의 경향 덕에 이들의 프라모델들은 정교하고 다양한 개수를 자랑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나같이 추억과 상상력을 지닌 ‘애어른’들의 감성을 쉽게 자극한다. 그렇게 사모은 것이 나름 두자리 숫자를 차지하게 되었다.
얼마전 [트랜스포머3]가 관객 600만여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한 독과점 상황을 감안하고서라도 장마철에 놀라운 결과다 싶다. 이런 기세라면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700만도 무난하게 돌파가 아닌가 싶다. 여전히 광고는 나오고 있고, 예고 영상은 매혹적이다. 나 역시 극장에서 2번 관람할 일이 있었다. 역시나 사운드는 대단하고, 놀라운 소란이었다. 동행자들의 의견은 반반이었지만 재밌다는게 중론이었던 듯 싶다. 아무튼 그 재미와 볼거리라는 녀석이 없었다면 600만여명은 설명이 안될 것이다. 나 역시 재미와 볼거리는 인정하는 편이다. 그게 아니라면 3편까지 진도를 따라갈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3편까지 따라간 이유의 핵심은 아무래도 전언한 변신 로봇의 추억, 그 재현에 대한 미련 탓이 컸었다. 집과 친구네, 학원의 조그만 TV모니터로만 봐온 변신 로봇의 활약을 화려한 실사와 CG쇼의 교차로 볼 수 있다는 유혹은 애어른으로선 저버리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 몇년을 따라갔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트랜스포머]는 재밌는 변신 로봇 시리즈가 아니다. 변신 로봇들은 매 시리즈마다 추가되며 득시글하게 나오는데 도무지 이들에게 애정을 줄 틈이 없다. 이름 소개나 제대로 해주면 다행이고, 퇴장 처리도 엉망이다. 로봇 육체를 감싼 철근 피부를 마구 뜯어내고 흉한 기계 내장을 보여주는데 재미를 들인 2편부터는 아주 기가 막히다. 로봇을 두고 가학행위를 하는 포르노나 스너프 필름을 보는 기분이다. 가장 핵심이 되는 변신 장면의 처리는 1편부터 악명이 높았다. 클립 조각 수십 수백개가 제멋대로 따다닥 돌아가니 어느새 로봇이 되어 있는 형국이다. 거기에 로봇들의 잔치에 자꾸만 끼어드는 멋없는 군인들의 활약은 볼썽사납다. 미국 패권주의 비판 같은 이데올로기 비판은 평론가들이 하면 될 몫이지만, 일반 관객의 눈엔 한마디로 로봇 만화에 왜 말많고 유머감각이 부족한 시끄러운 인간들이 설치는가 싶다. 현실의 질감과 타당성을 부여하고픈 연출의 동기가 있었겠지만, 동기가 좋은 결과를 만들지는 못한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일관되게 완성도로 칭찬받는 영화가 아니었다. 로봇 액션의 쾌감에 대한 기대로 관객을 모은 영화인 탓이다. 그 기대는 3편에서도 충족되진 못했다.
사실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그렇게 추락할 시리즈가 아니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구매한 중고차가 실은 변신로봇이었다는 발상은 애어른이나 청소년들이나 소년들이나 모두 혹할만한 구석이 충분했다. 여기에 스며드는 전형적인 선과 악의 대결구도도 단순명쾌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여기엔 전제가 깔린다. 그것을 설명할만한 캐릭터들의 매력과 시간 안배가 중요하다는 점. 하지만 인간 캐릭터들은 시끄럽고, 로봇 캐릭터들을 제대로 설명해줄 시간과 애정이 영화 속에 부재해있다. 액션은 속전속결이고 편집인 빈틈이 군데군데 나 있다. 남은 것은 파괴와 대결, 로봇 학살, 황급한 해피엔딩이다.
변신 로봇의 영상화에 대한 기대와 쾌감은 다시 한번 절망으로 바뀌었다. 헛된 희망이 아니길 바랬던 일말의 기대감이 이번 여름에도 채워지진 못했다. 그럼에도 오늘 저녁에도 나는 조립용 니퍼 같은 공구로 플라스틱 조각을 다듬으며 프라모델을 조립한다. 여전히 현실 영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을 상상 안에서 채우고자 함이다. 한편으로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실패로 인해 변신 로봇 영상화가 주춤하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하면서 말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가능할텐데…[1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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