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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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라 딘 호의 귀환]

trex 2022. 10. 27. 11:20

신대륙 발견의 희열이 있던 대항해시대의 15세기가 지난 19세기 초반, 식민의 역사의 얼룩과 함께 흉흉한 기운을 안고 실종된 배형 선박이 기적처럼 귀환한다. 하지만 선체는 텅 비어 있고 몇몇 잔해와 선박에 탑승한 인원들이 남긴 흔적만으로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으니 이걸 동인도 회사의 보험 담당 직원인 내가 선박 곳곳을 누비며, 그것을 기반으로 모든 내막을 조사해야 한다. 나를 도와주는 것은 회중시계의 신비한 존재다. 사망자들의 유해 부근에 이 시계를 작동하면 사망 당시의 정황과 주변 정보에 대한 힌트를 주는 식으로 이 사건에 대한 총체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나는 이 조각난 정보를 취합해 일지를 한장한장 채워가며 진실에 보다 가까워져야 한다. 19세기라는 시대를 떠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회중시계의 존재가 보여주듯 작품 안엔 크라켄, 큼직한 게떼, 정체불명의 인어 형태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거니와 이들은 적어도 극 중 적지 않은 인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다. 이 신비로운 판타지를 만든 것은 [페이퍼, 플리즈]라는 재기 발랄한 인디 게임을 만든 미국의 게임 개발자 루카스 포프의 보다 뚜렷한 성취물이다.

그는 이번에 눅눅하고 퀘퀘한 냄새나는 선상의 환경부터 여러 구조물을 투박하게 모델링하고, 작품의 음악을 직접 만드는 등 이번에도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전작이  미국의 1인 개발자로서 창작한 동구권 독재 국가에 대한 짓궂은 풍자가 가미되었다면, 이번엔 식민통치의 영국을 베이스로 내세운다. 극 중엔 영국의 장교들과 인도, 대만, 유럽 각국의 등장인물들이 공존한다. 이들은 배 안에서 서로 필요에 따라 협력도 하고 얌전히 공존하지만, 거친 뱃사람의 속성을 숨기지 못하고 서로 간에 상처도 주고 총칼을 겨누고, 실제로는 피치 못하게 살해를 감행하기도 한다. 

굿이라도 해야할지 초자연적 존재들의 습격은 잊을만하면 발생하고 - 크라켄의 습격 대목은 가히 크툴루 신화급 소재앙을 낸다 - 슬프게도 인간의 이기심과 완력이 엄연히 있는지라 참극은 멈추지 않고, 결국 60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비극을 겪는다.(몇몇 소수 인원 몇은 실종되어 아프리카 등으로 흩어졌다 정도로 보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무기력한 서사 안에서 주인공-플레이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누가 이 상황 안에서 헌신적인 희생을 감행해서 나름의 공이 세웠는지, 가해자의 역할을 했었는지 등을 판단할 수 있는지 또는 피해에 따른 보험료를 지급받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여명이 떠오르던 시절에서 할 수 있는 인도주의적인 판단은 이 정도이다.

루카스 포프가 만든 슬픈 선율의 음악과 흑과 백을 통한 최소한의 표현의 그래픽, 이를 받춰주는 연출력, 투박한 톤의 일러스트 등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샵을 통해 다른 타이틀보다 저렴한 가격대의 작품이라 설치했었는데, 소문만큼 좋은 작품이었다. 그저 받아만 놓고 잊은 상태로 연말을 보냈으면 큰일 날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