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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xism : 렉시즘
'달팽이와 다슬기' 정도를 제외하면, 이야기 구성이 비슷하다. 그야말로 끝까지 간다. 한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주는 행보든, 연정을 느낀 상대와의 타이밍을 위하여든, 옛 여자와의 약속을 수행하기 위해서든, 결혼식에 늦지 않기 위해서든! 과학을 동원하고 인맥을 동원하고 배짱을 부리고 체력의 극한까지 간다. 거기에서 재미가 발생한다. 이야기 끝까지 실어주는 곽재식 작가의 입담은 좋은 엔진 출력을 가지고 있다. '달팽이와 다슬기'는 예외적인 이야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와 더불어 한국 내의 다문화를 보는 시선에 대한 지적이라는 점에서 닮아있다. '달팽이와 다슬기'의 경우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Onesound판 부록 만화로도 볼 수 있는데, 현재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잘 읽히는 단편집..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독일엔 뿌리깊은 죄책감을, 서구권엔 깊은 정신적 상혼을. 그럼에도 미술은 제 갈 곳을 갈지자를 그리며 휘청휘청 나아간다. 폴락이나 워홀 같은 스타(!)들이 탄생하고, 플럭서스 안에선 한국인 백남준이 활동하게 된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마지막 3번째 권은 현대 미술에 대해 넉넉히 언급하는 듯 하지만, 그럼에도 빡빡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들이 태산 같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독자가 채워야 한다는 저자의 엄포는 사실이다. 이제 현대 미술은 회화의 캔버스를 넘어 페인팅을 하는 화가의 활력 자체가 사조가 되고, 작품은 연극성을 만나기도 하고 사진과 건축, 영상물과 조우하는 복잡한 미디어가 되어간다. 무엇보다 이제 미학적 작품과 자본주의 아래의 대량 생산품과의 간극은 좁아져 간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에 한해서 지금도 형편이 좋다고 보기엔 힘들지만, 예전엔 PC를 구매하면 무료 아닌 무료 게임들이 설치된 상태인 적이 많았다. 변종된 테트리스류 게임들, 소위 ‘고인돌’이라고 불렀던 게임, 창고 퍼즐 게임 등 내용물이 실로 다양했다. 동네 매장에서 컴퓨터를 구매하니 ‘울펜슈타인’이니 ‘둠’이니 깔려 있어 즐거워했던 기억도 난다. 되돌아보면 존 카멕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시아 몇몇 국가에 화를 좀 냈을지도 모르겠다. 공유와 확산은 몇몇 이상적 개발자들의 이상적 비전이기도 하지만, 상업 논리가 판치는 게임 대량 생산 시대엔 자칫 큰일날 몽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조던 메크너, 둘도 없을 캐릭터를 낳다. 아무튼 그런 게임들 중 하나는 [페르시아의 왕자]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고등학교 PC실..
탁월한 거짓말장이! 막힘없이 술술 푼다. 솔직히 말해서 막히는 대목에서조차도 거짓말로 다시금 상황을 돌파한다. 또는 시간과 공간을 눙치고 그저 넘어간다. 설화와 연대기를 섞으며 능청스럽게, 하지만 장렬한 서사로 세상에 둘도 없을 기나긴 이야기를 보여준다. [고령화가족] 독서 당시 아무래도 [고래]보다 처지진 않을까 했는데 과연 이 시점에 읽어보니 그렇다. [고래]는 현대사의 몇가지 순간들을 맘내키는 대로 박아내고, 자본주의의 괴물 같은 돌진력을 전시해주고 종내엔 환상성의 서정으로 등장인물들의 인생들을 내리쬐는 봄햇살마냥 위로해준다.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국내도서저자 : 천명관출판 : 문학동네 2004.12.24상세보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ㅂ진 않지만,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ㅇ…도 아니지만, 온 몸을 유니클로로 장식한 나는 양재역 3번 출구 부근 카페 파스쿠치에서 황송스런 소개팅을 하고 있다. 탕비실에서 옷자락이라도 스칠까 두려운 디자이너 예대리를 제외하고는 여성이라는 개체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나로선, 건너편 알토톤의 28세 여인이 존재만으로도 경이로울 뿐이다. 문제라면 나는 달변가가 아니고 – 굳이 말하자면 체내에 이물질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사는 숙변가에 가깝다 – 소개팅 상황별 시츄에이션에 익숙치 않다는 점이었다. 개발 다이어그램은 곧잘 만드는 편인데 말이지. 암튼 통성명이 오가고 가볍게(그리고 아스라이 너절하게) 신상 정보가 오고 갔고 세번째 순서로 자연히 서로의 취미 정보를 교환하였다. “건담 ..
생각의 지도국내도서저자 : 진중권(JUNGKWON CHIN)출판 : 천년의상상 2012.09.10상세보기 씨네21 글 모음이니 신선도는 떨어진다. 근간에 트위터 배틀러와 미학자 사이, 그래도 미학자의 입장에 가까운 문장들이라 안심은 하셔도 된다. 물론 일부 실명들에 대해선 여전히 가시돋힌, 진중권 다운 입장은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으니 이것도 안심(...)하셔도 된다. 내 개인적으로는 [서양미술사] 세번째 권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시간을 채울 수 있었던 도서.
가지를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지를 잘 못 먹는다. 아예 못 먹는다 정도가 아닌게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애써 찾아서 먹진 않는다. 나말고도 이런 사람들이 제법 되는 것으로 안다. 이유도 대개는 비슷할 것이다. 강수지가 살며시 다가왔다고 노래한 ‘보랏빛 향기’ 대신 ‘보라빛 몸통’과 몸통 안에 무엇이 담긴지 알 수 없는 물컹함의 겸비라니. 왜 이런 존재가 인간들의 찬거리가 되어 나같은 나머지 인간들의 고행거리가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가지가 싫다. 가지란 녀석은 어디서 살펴보면 고혈압에도 좋고 항암 작용도 한단다. 반면 어디 다른데서 검색해서 보면 가지는 94%의 수분과 1%의 단백질만 있어 영양학적 가치가 별로 없단다. 어느 장단에 맞춰 가지를 위한 춤을 춰야 하나? 타 개체를 위한 이로..
기성 세대가 보기에 SNS란 철없는 젊은 아이들의 불만투성 낙서장 쯤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속엔 어느 정도 세상의 진실들이 벽지가 되어 발라져 있는데, 특히나 한국 거주 2-30대 여성들의 토로들이 그렇다. 낮은 임금의 업무 환경, 대화에 대한 노력조차 질식시키는 상대방의 배려없는 언사들, 이런 것들로 점철된 일상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이 2-30대 여성들의 소리없는 비명들을 덮는건, 이들을 향해 세상이 함부로 규정하는 스테레오화된 박제풍 묘사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순대국밥 한 그릇값은 능히 나올 가격의 커피에 환장하고, 비싼 명품에 침 흘리고, 아무 이성에게나 마음 흘리고 때론 몸을 함부로 굴리는 화냥”의 이미지. 이런 여성에게 던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