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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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15화

trex 2011. 9. 21. 09:00

[노래 한 곡과 A4지 한 장]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기획.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입니다. 이 시리즈는 한 사람의 청소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음악 편력기를 통해, 취향이 한 인간의 성장과 사고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 아닌 그냥 글을 써서 흔적을 남기는 성질머리의 한 예시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연재물을 통하여 이문세, 뉴키즈온더블럭, 건즈앤로지스, 신해철, 마를린 맨슨, 툴 등의 다양한 뮤지션들을 알차게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적기엔 너무나도 죄송할 뿐입니다. 아무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 2년간의 조용한 대학 생활을 잠시 접고 입대 영장을 받게 된다.

 

훈련소에서의 노래는 딱 두가지였다. 군가와 찬송가. 군가는 '전선을 간다' 같은 훌륭한 곡들도 있었지만 나머지 노래들은 그냥 고만고만했었다. 게다가 심지어 몇곡은 암기를 해야 했다. 찬송가는 매주 일요일 오전 종교 행사에 가면 듣고 부르게 되었다. 신자는 아니었다. 지금도 아니고. 그냥 초코파이 먹으러 갔던게지. 불교 쪽 행사엔 만두류를 줬다고 했는데 사실 그쪽이 좀더 이익이었을텐데, 귀찮아서(?) 6,7주간 내내 기독교 행사만 갔었다. 내무실엔 당연히 TV가 없었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계속 훈련을 받고 있으니 아무튼 세상은 무사히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사실 몇몇 대중음악들이 취사실 저편에서 들려오곤 했다. 좀 시간이 지나서야 그 노래가 룰라의 '천상유애'였음을 알았다. 룰라는 학생 시절에도 좋아한 적이 없었고 좀더 시간이 지난 뒤 이현도의 곡인가를 받아서 활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천상유애' 관련한 사건에 들어서는 제법 고소해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45일의 훈련소에서의 생활이 끝났다. 이 글에서는 군 생활의 조각들과 그에 대한 소회를 늘여놓을 생각은 없다. 바삭 마른 상태로 터진 손등 등의 기억과 회색빛 풍경에 대해서 구구절절히 적어봤자 나는 작가 김훈이 아니므로 처절한 정서로 읽는 이들을 설득시킬 자신도 없다.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인가 수원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수도권 어디론가 빠지는 수송 버스. 그리고 군 생활 중 가장 안락한 순간인 - 아실게다 - 대기 기간이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이동 중에 디제이 디오씨의 '탈의탈의'(...),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 아이돌의 '바우와우' 등이 군 수송버스 안의 카스테레오을 통해 재생되었다. 아 요새 사회에선 이런 노래들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내가 입대를 하니 음악들이 참 가벼워지는구만이라는 별 택도 없는 생각도 머금었다. 그리고 대기 기간마저 끝나고 내무생활이 시작되었다. 훈련소의 고통쯤이야 가볍게 넘기게 만드는 시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실 별 필요도 없는)좋은 인상도 받았지만, 대체로 선임병들은 날 '고문관' 후보군 쯤으로 생각했던 듯 하다. 자대 배치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친척들이 면회를 와 외출을 나가는 '파격'(?)을 보여주기도 했고, 사실 군대에서 좋아하는 삽과 곡괭이질에 능하지 못한 탓이 컸으리라. 전공 때문에 몇몇 선임병들의 연애 편지도 한두장 쓰기는 했다만, 본 적도 없고 갈구할 필요도 없는 이성에게 내가 무슨 문장을 쓰겠는가. 뭐 하여간 내무실은 세상에 사려져도 큰 상관은 없을 남자애들의 군집이었다. 이 남자애들이 실탄을 넣은 총을 들고 화약고를 지켜도 세상의 안전엔 그다지 큰 도움은 안될 듯 싶었다.

 

이등병과 일병 시절 사이에 약간 요령이 생겼다. 사실 내무실 질서를 생각하면 위험한(?) 짓이기도 했는데, 슬슬 내 관물대 속에 콜렉션을 채우기 시작했다. 듣고 싶은 음악 테이프를 외근이 종종 있는 인사계 동기나, 당시 '마지막 방위'라고 불린 보충병 병장급들에게 부탁한 것이다. 첫 테이프는 기억이 맞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 앨범이었다. 아실 분들은 아실 내용물, 가사가 추가된 이전 넘버들과 몇 개의 트랙을 짧은 볼륨에 담은 앨범인데 그래도 무척 듣고 싶어서 부탁했다. 내무실의 오디오에서 듣는다는 것은 내 '군번'으로는 위험천만한 짓이라 그냥 사놓고 관물대 안에서 숨을 죽인 상태로 보관되었다. 가사는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라고 적혔지만, 난 여기서 뭘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라 다소 안타까웠다.


 

신해철의 [정글스토리]는 인사-군수 사무실 안에서 작업 지원 나왔다가, 한 중대장이 읽다가 만 [주간조선]에서 발매 소식을 보고 작은 흥분을 느끼고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외박을 마치고 돌아온 1개월 차이 후임병은 약속대로 그 앨범을 무사히 입수를 해줬고, 나는 듣는 일만 남았는데... 심야 화약고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추운 봄날밤에(군부대는 봄에도 춥다!) 잠들기 전, 내무실 오디오의 최소 볼륨으로 몰래 들었었다. 불침번 선임명에게 발각이 되었거나, 자다가 음악소리를 듣고 깬 선임병이 있었다면 나는 다음날 오전에 '말 그대로' 박살이 났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래도 군대 안에서 몰래 들으며 울컥한 '절망에 관하여'라니. 이것도 지나니 추억은 추억이다.


 

여름이 가까워졌고, 나도 드디어 첫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11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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