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인증의 은하계 본문

생각하고뭐라칸다/시사/매체/게임등등

인증의 은하계

trex 2011. 2. 1. 10:22

+ 한겨레 웹진 HOOK에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21178

스마트폰 보급과 140-150자 단문 SNS 서비스로 인해 부쩍 늘어난 것이 ‘인증’ 문화의 확대가 아닌가 싶다. 인증이라는 단어는 법적 용어였지만, 웹의 마당 안에선 개인 소비활동의 찰나적 피력으로 의미가 변한 듯 하다. 이제 우리들은 오매불망 허덕이며 기다리던 택배가 도착하면, 부리나케 박스 외곽부터 내용물까지 속속들이 공개한다. 내용물의 조립 과정, 내용물의 활용과 기능, 내용물의 분해 과정까지 정성이 가득한 인증의 행위엔 소박한 과시욕과 자신의 소비행위에 대한 합의를 얻고픈 귀여운 손짓이 내재된 듯 하다.

단문 SNS 서비스는 인증샷에 대한 부러움의 동조를 즉발적으로 낳는다는 점에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이웃이 한정판 DVD 박스 인증을 하면 내심(또는 제스츄어로) 부러워하고, 이에 질세라 저녁 뮤지컬 관람을 앞두고 공연장 스케치샷을 올려 반대로 이웃들의 부러움을 유도한다. 이런 인증 문화의 낌새를 진작에 알아챈 사업자들은 SNS 서비스와 연동한 기능들을 내놓고 있다.

포스퀘어(FOURSQUARE)의 예를 들어볼까. “내가 지금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도착했어! CGV 개관 기념 언니네이발관 무대를 보러 온거지!”라는 인증 문구의 승리감을 기록하면, 포스퀘어는 ‘뱃지’이라는 선물을 덤으로 선사한다. 동일 장소에서 뱃지를 획득할수록 ‘시장’의 직위에 가까워진다. 치즈와 쥐덫 운운하는 서울시장은 현실 세계에 따로 있지만, 나는 잘만하면 포스퀘어 안에서 영등포 타임스퀘어 시장이 될 수도 있다. 포스퀘어는 인증 문화를 바탕으로 ‘게임 레이어’ 이론을 접목시킨 것이다. 성취욕과 아이템 선사라는 떡밥을 깔면 유저들이 기분 나쁘지 않은 경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굳이 게임 이론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어떤 개인은 거리낌없이 인증 놀이에 도취된다. 두산인프라코어의 박용만 회장은 “발매되었대”, “발매되었다네”라는 쑥덕거림의 대상이 되었던 구글 넥서스원 스마트폰을 호쾌하게 동영상으로 구매 인증한 바 있었다. 한 손을 캠을 들고 있던 탓에 나머지 한 손으로 하얀 박스를 거침없이 뜯던 박회장의 인증 행위에 일부 네티즌들은 즐거움과 부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갤럭시탭에 대한 SNS 인증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영향력 있는 재계 인사들의 인증이니만큼, 구매력을 지니고 있던 유저들에게 적잖은 울림(지름신!)을 줬으리라 여겨진다.

따지고보면 인증 문화는 싸이월드 사진첩 ‘셀카’ 폴더의 전이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부(Cebu) 휴양지의 비키니 셀카를 올리며, 득의양양하게 자신의 청춘을 기록하던 행위는 SNS로 속도감이라는 무기를 얻었다. 이제 나르시시즘도 채우고, 내가 구매한 제품에 대한 타인의 부러움도 실시간으로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덧글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바로 멘션과 RT가 증식하는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증 문화는 물신주의가 가장 유쾌한 긍정성으로 인정되는 마당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인증 문화엔 개인정보와 신상에 대한 위협이라는 그림자도 공존하고 있다.

가령 내가 지산락페스티벌의 드넓은 잔디 위에 도착 인증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어떤 이가 인증 쓰레드의 지리적 좌표를 보고, 드넓은 잔디 위 내게 달려와 계란과 토마토를 투척한다면? 반쯤 웃자고 적은 이야기지만 사실상 인증 행위엔 자신의 신상을 조금씩 깎아서 내보이는 대가를 수반한다. 물론 조금씩 주의하고, 조금씩 머리를 쓴다면 계란과 토마토의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증 문화를 둘러싼 온갖 불상사들은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불안해하기엔 당장에 인증 문화가 나와 타인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매력도를 저버리기 힘들다. 촛불 현장의 인증들이 쌓이니 하나의 기록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네가 올린 흐릿한 촛불빛이 나를 퇴근길 청계천으로 오게 하더라… 옛적 일 같은데 그게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 크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인증 문화가 개개인의 일이면서도 서로를 묶어주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증의 은하계는 항시 이런 가능성을 품고 있다. 각자 빛나던 개별자들의 별이 갑자기 거대한 성운이 되는 위력을 지닌.

지금 당장에는 정치 인사들의 울적한 인증샷들이 올라오는 형국이다. 광주 묘역의 상석에 잘 닦인 구둣발을 자랑하듯 올린 한 당대표의 독특한 인증샷은 그가 민주주의와 ‘역사에 대한 예의’를 이해하는 독특한 해석법을 짐작케 한다. 인증의 은하계 저편에 서린 범상찮은 블랙홀, 불쑥불쑥 그 세력을 밉살스레 과시나 하지 말길 음력 설에 소박하게나마 기원한다. [01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