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논쟁의 감상기 : 실망, 근심, 반성을 위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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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감상기 : 실망, 근심, 반성을 위하여.

trex 2011. 2. 14. 16:53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최고은씨의 타계를 전후로 '글 쓰는 직업군'과 '문화산업의 테두리 안에서의 창작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나같은 경우, '글 쓰는 직업군'을 낳는 전공 출신인지라 '글 쓰며 인생을 구가할 수 있는' 순진무구한 일장춘몽을 말했던, 몇몇 지우들이 떠올랐다. 대개는 그들은 교단(또는 학원계)에 있으며, 대개는 글과 관계없이 일상의 다른 영역들에서 가투를 벌이고 있다. 각오가 부족했던 것일까. 그럴수도 있다. 정말 치열했고 덜 순진했던, 그리고 나와 덜 절친했던 몇명의 사람들도 떠오른다. 그들은 지금도 굴하지 않았을까. 


평론가 조영일과 소설가 김영하가 공교롭게도 최고은씨의 타계 전부터 벌여온 '문학과 작가론'에 대한 논쟁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관심이 부족했고, 의미있는 마무리가 지어지길 소박하고 무책임하게 기원했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퀴즈쇼]로 대표되는 근간의 김영하가 보여준 성과가 더이상 관심을 둘만한 차원은 아니었던 이유가 강했다. 쾌락이든 고통이든 아무런 상흔도 남기지 못하는 작품에게 독서의 시간을 과하게 투자했구나하는 후회를 당시 느낀 바 있었다.


그런데 일의 국면은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평론가 조영일이 김영하와의 논쟁의 연장선에서 흘린 트윗 "여성작가들은 부모 또는 남편이 있기에 (책이)팔리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운운이 빠른 속도로 퍼졌고, 김영하는 일견 보다 신중한 자세로 최고은의 죽음을 거론하며 장문의 문장을 남겼다. 일견 신중해 보였지만, 한때 제자였던 최고은과의 에피소드를 거론한 그 문장들은 갑작스레 조영일과의 논쟁을 거론하며 문학 후학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로 탈바꿈하였다. 그 방법론이 굉장히 난삽해 보였음은 일단 솔직한 사견이다. 굳이 그랬어야 했을까. 


조영일과 김영하간의 논쟁을 낳은 대목은 '문학과 작가정신'을 보는 선명한 대립선이다. 김영하 자신도 어느정도 인정하였듯 낭만주의자의 시선이었고, 일종의 역사와 현실을 넘어선 초극적 정신과 유머를 잃지 않는 낙관론이었다. 조영일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반대 입장에 선 이들에겐 '가진 자의 여유'로 보일수도 있었고, 결정론적 시선일수도 있다. 당장에 우리 발 밑에 떨어진 숱한 과제와 암담함을 우회하는 비겁함으로조차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논쟁 과정에서 반대는 할 수 있어도 김영하를 치사하고 비겁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김영하를 향한 험한 소리들 중엔 '본 이슈'를 핑계로 그동안 '어느정도 벼르고 지켜본' 이들의 입장도 있음은 상당간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최고은씨를 거론한 글에서부터 이 낭만주의자의 어조가 위태로움을 보인 듯 하다. 연결이 가능한 대목이라도 굳이 그 글들에서 추모와 논쟁은 같이 자리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낭만주의적 작가론을 견지하는 것은 죄도 아니고, 기실 문학사의 오랜 논쟁 대목이기도 하다. 논쟁은 충분히 뒤에 이어질 수 있었고, 그때가 마침 숨을 고를 시간대일수도 있었다. 이후 숱한 언어 포화를 감당한 김영하는 급기야 블로그와 트위터 폐쇄 공지를 올렸지만, 그가 덧붙인 최고은씨에 대한 이야기는 경향신문 등에 다시금 실리고 확정되어 한갓 이슈가 된 듯 하다. 그로선 최고은씨에 대한 코멘트는 '진실과 본질'에 대한 호도 경계 차원이나 추모의 덧붙임 방식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처음에 시작했던 문학 논쟁은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하고 거품이 되었다. 이 대목은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김영하 측 보다는 언론 생리가 가진 취약함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로선 김영하의 폐쇄 인사에 있는 '부족한 저는 골방에서 저의 미성숙한 자아와 어두운 욕망을 돌보겠습니다.'라는 대목이 다소 걸린다. 그가 가진 낭만주의적 작가의식과 문학관에 대해 교정 요구나 날선 반대를 표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끝나지 않는 논쟁의 종지부 치고는 보완과 각성이 아닌 제자리 걸음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자신과 상반된 문학관을 지닌 이들의 백의종군에는 형식적 인사를, 자신의 나르시시즘엔 위안을 주는 이런 매듭이 옳은 것인지는 나는 갸우뚱하다. 물론 이 우려는 전적으로 나의 비약이다. 나의 비약과 근심이 틀렸길 바란다. 물론 김영하의 다음 작품을 읽을 용기는 여전히 없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따라 너무나도 얼토당토 않게 보이는 조영일의 트윗과 김영하의 후퇴에 비해 소설가 김사과의 곡진한 문장은 이번 논쟁의 소득(?)이었다. 한때 그렇게 쓰고 싶고 그렇게 배우고 싶어서 자신이 치열한 줄 알고 착각했던 오류의 청춘 시대가 나에게도, 내 지우들에게도 있었다. 김사과의 몇몇 문장들은 정말 치열하고 절실해서, 그리고 회의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낳을 수 있는 영역인 듯 하다. 그 부분이 부럽고, 닿지 못했던 비겁한 체력과 정신에 대해 새삼 반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