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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들, 난데없는 된서리를 맞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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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들, 난데없는 된서리를 맞다.

trex 2012. 1. 12. 11:42

한국만화계에 며칠전 기쁜 일이 하나 있었다. 지난해 12월 29일을 기해 ‘만화진흥에 관한 법률안’ 제정이 임시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이로써 만화계의 오랜 숙원 중 하나가 해소가 된 것이다. 이 법률안에 만화 관련 법령 및 제도의 개선, 만화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방안, 만화산업 및 디지털만화 관련 기술 표준의 개발과 보급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니 앞으로 의미있는 움직임을 기대해봄직 하다. 한국만화가 그동안 받아온 음양의 천대는 아는 이들은 알 것이다. 한국영화계는 한때 성장동력 취급까지 받아오다 최근 눈에 띄는 하락세를 보이고 있고, 대중음악 시장은 케이팝이라는 일장춘몽을 떠올리는 중이며, 온라인 게임계의 성장세는 뚜렷하나 최근 난데 아닌 ‘셧다운제’ 서리를 맞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대본소 시대’와 '청소년보호법의 시대'의 냉대를 견뎌내고 웹툰 시장이라는 흐릿한 활로를 개척해가는 한국만화계가 작은 힘이나마 업은 것이다.


그런데 그 기쁨에 누군가 찬물 한 바가지를 철썩하니 끼얹었다. 국내 유력(?) 일간지 중 하나인 [조선일보]가 1면 기사에 턱하니 웹툰 작가 귀귀의 [열혈초등학교]를 ‘학원 폭력의 근원’인양 지목한 것이다. 학원 폭력을 둘러싼 사회의 시선이 한데 집중된 형국인데, 누군가의 다짐이라도 서린 듯 제대로 두들겨 맞았다. 전문가들의 우려가 담긴 견해들이 지면에 옮겨졌고, 그간 [열혈초등학교]에 대한 우려를 표명해 온 네티즌들의 이야기도 좀더 설득력을 얻었다. 그런데 이후의 일이 다소 의아하게 흘러갔다. 웹툰을 연재하는 야후 코리아의 웹툰 섹션에서 [열혈 초등학교]의 에피소드들이 최근 연재본을 제외하곤 실시간으로 삭제된 것이다. 아마도 1면 기사 보도 후의 파급이 아닌게 아니라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던 모양이다.


더 묘한 일들이 이어졌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지난 9일 “학교 폭력 조장의 원인으로 지적받는 폭력적 성향의 인터넷 연재 웹툰에 대해 중점 모니터링을 진행 중”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국내 유력(?) 일간지의 힘이랄까. 잠잠하던 규제와 심의의 칼날이 모터를 달고 작동하기 시작했다. 참신한 소재 발굴과 외연 확장으로 영화계까지 탐내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한국 웹툰계에 난데없이 내린 한파인 것이다. 2011년 3월 [열혈초등학교]가 불법, 유해정보로 신고될 당시 ‘증거불충분’으로 ‘해당없음’의 결론을 내린 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태도를 바꾼 채 심의의 폭을 웹툰 전체로 돌린 셈이다. [열혈초등학교]를 비롯한 한국 웹툰계가 낳은 몇몇 작품들이 하루 아침에 학원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이게 온당한 일일까.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모니터 결과가 권고 수준에서 끝날지, 적극적인 심의의 시작일지는 아직 알 도리는 없으나 상당히 불편한 일이기는 하다. HOOK 지면을 빌어 한두번 적어 왔으나, 다시 한번 물어보기를 세상의 폭력과 크게는 테러리즘의 원인에 비디오 게임을 지목할 수 있을까? 동일한 형태의 질문은 이어진다. 과연 학원폭력의 원인 중 하나는 시중의 웹툰들일까? 질문 자체에 대한 답은 쉽진 않다. 다만 이렇듯 게임 아니면 만화로 규제와 심의의 시선을 확장하는 것이 과연 현재 폭력, 따돌림, 자살로 얼룩이 된 학원폭력 문제를 고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인 것일까. 왜 게임과 만화 같은 하위 문화 컨텐츠들은 마치 원죄라도 뒤집어쓰고 있는 양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걸까. 언제까지? 위기의 교권과 완강한 입시 제도의 비합리성, 해부할 엄두조차 못하는 10대 교우 관계에 대한 연구는 누구도 해볼 생각을 않는 것일까. 구조 내부가 아닌 외부에만 화살이 온통 향해 있다.


야후 코리아의 대처도 능숙하지 못했다. 같은 섹션에서 연재되는 타 연재작이 ‘자살 학생’ 관련 이슈로 파문을 일으키자, 황급히 내리고 동일 작가의 새로 그린 연재분을 올린 전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외부 목소리에 민감한 듯 하다. 요컨대 제대로 된 입장 표명이나 운영안에 대한 확고함이 부족해 보인다. 이들은 [열혈초등학교]를 황급히 삭제하고 난 뒤에 2월 중 작가 귀귀의 신작을 공개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뭔가 매끄럽지 않아 보인다. 덮기에 급급한 모습을 두고 한국만화계가 그들을 연재처이자 매체로써의 ‘동지 의식’을 느끼기란 힘들었을 듯 하다. 결국 한국만화가협회와 우리만화연대, 한국카툰협회 등은 지난 10일 표현의 자유 침해 중단과 사회적 논의와 합의 선행을 제안하는 공식 입장을 발표하였다. 실질적으로 출판물과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상물이 자립하기 힘들어진 한국만화계에서 웹툰계는 지켜야 할 보루이며, 작가로서의 자의식상 표현의 자유 수호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 유력(?) 일간지가 학원 폭력에 대한 깊은 근심과 학생 인권에 대한 관심이 있음은 아무튼 알겠다. 그럼에도 이미 그들 매체의 여성지인 [여성조선]이 1월호로 발간한 기사 중 한 토막은 바로 웹툰 작가 귀귀 인터뷰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얄궂은 타이밍이다. 해당 여성지 인터뷰에서 귀귀의 작품은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문구에 실린 기대작인데, 같은 발간처의 일간지에선 ‘학원 폭력의 원흉’ 취급을 받았다. 시간차 공격이라도 할 셈인가. 잠시 말하자면 한 명의 독자로서 [열혈초등학교]가 다소 근심스러운 작품임은 인정한다. 그 안엔 구타 묘사가 있고, 일부 부적합한 묘사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폭력 조장이라기 보다 폭력 자체를 묘사하는 방법론에 관한 유희가 더욱 강렬해 보였다. 거창하게 보자면 거기엔 ‘폭력을 소비하는 세태’를 ‘재소비’하는 귀귀만의 작법이 있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도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력(?) 일간지가 그렇게나 수호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조차도 그들의 자유 민주주의 최고의 가치로 보장한다는게 ‘표현의 자유’라는데, 그건 미처 따라할 생각이 정녕 없는 것인가? 나는 이 궁금함을 풀 길이 없다. [110112]


+ 한겨레 웹진 HOOK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37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