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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3 : 5월 15일 왕십리역 앞에서 생긴 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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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3 : 5월 15일 왕십리역 앞에서 생긴 일

trex 2012. 5. 21. 11:28

웹진 HOOK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41866





지난 5월 15일 왕십리역, 아니 이미 13일부터 분위기는 감지되었지만 역 앞 광장엔 내리는 빗줄기에 아랑곳 않는 수많은 인파가 형성되었다. 미국의 게임 제작사 블리자드(Blizzard)가 12년만에 내놓은 새로운 디아블로 시리즈의 신작 3편 판매가 시작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왕십리역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는 디아블로 3편의 '초기 한정판'을 사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이 한정판에는 게임의 오리지널 디스크는 물론, 특별히 게임 분위기에 맞게 제작된 USB, 게임의 제작과정을 담은 DVD, 컨셉 아트 책자 등이 동봉되어 있었다. 내리는 빗줄기는 그칠 줄 몰랐고, 밤이 되자 판매를 앞두고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판매 개시 시점에 새치기를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군용 나이프를 들고 온라인에 메시지를 올린 한 청년이 경찰서를 오갔고, 행사 시작 전엔 몇몇이 텐트를 쳤다 철거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언론들은 이 현장을 놓치지 않았고, 몇몇 어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임 하나 구매하는데 꼭 저럴 필요가 있는가?



그들에겐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한정판 안의 특전을 먼저 선점하기 위하여?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것이다. 그건 아마도 외신에서도 간혹 보도 되는 '신형 아이폰을 사기 위해 그 전날부터 장사진을 이루며, 샌드위치로 연명하던 사람들' 같은 풍경의 한국식 버전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에게 구매는 단순한 구매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의식'이나 개인적인 축제의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과 같은 기다림의 의식을 치루는 타인들과 뭔가 뜨뜻한 기운의 동질감을 공유하고, 판매가 시작되면 짜릿한 시간 차이의 경쟁을 치룬다. 이런 행사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때문에 가치가 있다. 상품을 획득하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데가 없다. 두팔을 추켜세우고 자랑스러운 인증을 남긴다. 단체 사진을 찍거나, 현장에 있던 증거를 남긴다. 얼굴에 가득한 다크 서클은 이미 문제가 아니렸다. 단독 게임 패키지 판매가 2-3만개면 이변이라는 시절에 걸맞지 않게, 디아블로는 하루 이틀만에 수만장을 팔아치웠다고 한다.



디아블로 시리즈는 어떤 게임인가. 시리즈 내내 선과 악으로 대표되는 선명한 대립구도를 보이는 스토리를 가진 이 게임은, 시리즈가 지속될수록 세계관의 설정이 추가되었으나 그것으로 게이머들의 머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시리즈 내내 비슷한 작동 방식을 선호했고, 사냥과 아이템 획득이라는 일관된 유희에 초점을 맞췄다. 게임 발매년도의 수험생들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는 장난이 온라인에서 통할만치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플레이가 일품이었고, 12년만의 발매라는 이슈는 이전 2편을 지닌 게이머들에게도 향수의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구매를 위해 줄을 선 수많은 인파는 왕십리를 '헬(Hell)십리'로 칭하게 만들었고, 여러 우스개 소리들을 남겼다. 물론 우스개 이후엔 다소 씁쓸한 이야기도 들려왔다.



행사 주최측은 한정판 행사의 규칙상 1인당 2개 구매로 제한하였으나, 기어코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2,3배 크게는 4배 가격으로 매물을 올리는 구매자들이 일부 있었고 모 오픈마켓 사이트에선 한정 판매 행사를 했으나 서버가 감당하지 못하여 이용자들의 빈축을 사고 말았다. 또한 대형 마트 판매 행사 역시 전례가 부족한 일이라, 내부 담당자들의 대응이 매끄럽지 못했고 이 또한 방문자들의 큰 원성을 샀다. 특히 제주도 소재 대형 마트는 지역 특성상 수도권보다 시일을 늦게 진행하였으나, 마찰과 불미스러운 에피소드만을 남긴채 씁쓸하게 판매 행사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게임 중독'이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트집잡을 궁리만으로 가득한 언론과 기성 세대들에겐 이런 낯선 풍경이 좋은 먹잇감이 된 셈이다.



디아블로3는 발매 이전, 아이템 경매 시스템 등의 자체 서비스를 개발 완료 시점부터 공개하였으나 '바다 이야기 사태' 이후 게임 전반의 사행성을 우려한 게임등급위원회 등에 의해 내내 심의가 반려되어던 터였다. 그러던 것이 결국 국내 발매 버전엔 아이템 경매 컨텐츠를 삭제하여 세계 동시 발매 국가에 누락되지 않은 채 게이머들의 기대감을 안고 발매한 것이다. 게이머들의 기대감과 환호가 가장 올라갈 시점에 일부 언론들은 '좀더 더 물어뜯을 일이 없나'하며 주시하고 있었고, 왕십리 역 광장에 모인 인파들을 손쉽게 '중독자'로 호명하기에 이르렀다. 1년에 2번 개방한다는 간송미술관의 대기 행렬은 '간송 중독자'이고, 모처럼 야간 개장한 경복궁에 입장하기 위하여 줄을 선 시민들은 '경복궁 중독자'인 셈인가. 참으로 지독한 심술스러운 호명이었다.



디아블로3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한정판 이야기에 한해서는 다소 잠잠해진 편이다. 아직도 터무니없는 가격에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매물들이 있지만, 현명한 소비 심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유욕 역시 자본주의 세상의 기묘한 구경거리라 실상 말릴 길은 없다. 한정판의 재생산을 초구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그 기업의 게임 브랜드 관리가 평소 어땠는지는 전례를 보면 알 일이리라. 현재 게임을 둘러싼 원성의 목소리는 게임운영으로 옮겨간지 오래인 듯 하다. 막상 전쟁(!)을 치르듯이 구매한 게임이 현재는 '서버 접속 문제'로 게임 운영사와 게이머 모두에게 제대로 홍역을 치르게 하는 모양이다. 획득의 쾌감과 동지의 구성이라는 연대를 만들어내는 게임 세계로의 몰입이 여의치 않게 된 것이다. 게이머들에겐 날벼락이며, 현상을 보는 이들에겐 또 하나의 이야기거릴 만들어내는 셈이다. 평소 게임의 완성도에 대해선 유난히 좋은 평판을 얻어온 제작사의 이력을 보자면 당황스러운 일이다. 



이제 왕십리역 앞 행렬들은 이곳을 기억하는 풍경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그 행렬들은 이제 게임에 접속하기 위한 대기열로 온라인에 새롭게 줄을 서있다. 그들을 보고 단순히 '게임 중독'으로 진단하는 단편적인 시선으로는 이해의 폭을 줄일 순 없을 것이다. 새벽녁까지 접속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들을 편협한 사회병리의 결과로 보는 수준으론, 이 현상에 대한 어떤 해법의 단초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나눠진 시선은 굵은 평행선을 유지한 채 거리감을 형성하는 중이다. [12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