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이승환 [HUMAN] 본문
+ 네이버 오늘의 뮤직 : http://music.naver.com/today.nhn?startdate=20090718
+ 실은 이 글을 낳은 이글루스 당시의 원문 : http://trex.egloos.com/2789090
네이버 오늘의 뮤직 토요일 기획물인 '100대 명반'이 이 글로 인해 막을 내리는군요. 다음주부터 후속 기획으로는 네이버뉴스 아카이브 DB를 활용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저 역시 이 앨범이 정작 100대 명반에 못 들어갔을 때는 아쉬웠는데, 이렇게나마(...) 추가 기획으로 붙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들의 서운함은 돌리기 힘든 것이겠지만.
이승환 [HUMAN]
서울음반 / 95년 06월 발매
1. 천일동안
2. 악녀탄생
3. 체념을 위한 미련
4. 다만
5. 흑백영화처럼
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시시함
7. 내가 바라는 나
8.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9. 부기우기(Boogie-oogie)
10. 변해가는 그대
11. 멋있게 사는 거야
12. 너의 나라
13. 지금쯤 너에게
'발라드의 황제'라는 판에 박힌 수식어를 넘어서.
이승환에게 따라붙는 옛날 옛적 꼬리표들은 그를 온건히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한계가 명확하다. 어린 왕자라기보다는 그는 라이브 권좌에 군림한 독재자에 가까우며, 발라드의 황제라기보다는 팝의 영역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식욕의 탐식가에 가까웠다. 1집 [B.C 603]에서부터 이미 도사리고 있었던 메탈 키드의 자의식과 감수성 발라드 신성의 양면성은 차츰 성장하여, [2.5.共.感], [My story] 등의 앨범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실감케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이승환은 [HUMAN]에 당도하게 된다. 한 아티스트의 이력을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나누는 이 역작에서 그는 '진정 하고픈 모든 것'들을 펼쳐보이게 된다. 아득하게 우리를 이별의 차가운 대지로 매몰차게 내모는 강성 발라드 '천일동안'을 필두로 디스코, 헤비메탈, 포크 그리고 이윽고 프로그레시브의 영역에 닿는 '너의 나라'까지... 이것은 주류 아티스트가 당시에 내놓을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결과물이었다.
절치부심의 역작, 음악친구들과 새로운 정점에 닿다.
전작 [My story]가 보여준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사운드의 한계를 체감한 이승환은 보다 자신의 확장 의지에 걸맞는 작업을 택하기에 이른다. 데이빗 켐벨과의 작업과 음악감독 정석원을 앞세운 덕이기도 하지만 진정 [HUMAN]을 명반의 반열에 들어서게 한 요인은 테크놀러지와 음악적 진심이 어우러진 덕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확장의 발라드 '천일동안'이 보여준 거대한 스케일과 처절한 정서적 파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체념을 위한 미련'이나 '내가 바라는 나' 같은 소품(?)에서조차 명료하게 들리는 각 악기 파트는 사뭇 감동적이다. 이는 자본에 의한 테크놀러지가 준 수혜이기도 하지만 [My story] 이후 제대로 계단을 밝고 올라서 적절한 시기에 레벨업의 시기를 택한 이승환의 절치부심 덕이기도 했다. 이것 또한 운이라면 운이겠지만 실로 유효했던 시기였다.
한 음악인의 디스코그래피에 있어 이런 적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확실히 아니리라. 뮤지션을 믿어주는 제작사의 선택과 배려, 작업에 동참한 스탭들의 유효적절하고 시의적절한 투입, 가수의 얼굴이 커버에 박히지 않아도 수십만장 팔릴 수 있는 '95년' 당시 대중음반 시장의 상황. 이 모든 것은 정점의 순간이자 당시의 풍경에 부합했다.(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런 시대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전언했다시피 이승환의 디스코그래피는 [HUMAN]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된다. 보는 이에 따라 무리를 무릅쓴 이 고집스런 논지는 이승환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긍정을 낳게 하지만, 또다른 편의 사람들의 입장에선 동의하기 힘든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앨범 [HUMAN]은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같은 전작 히트곡 트랙들의 세계와는 다른 영역에 있다.
앨범 안에서의 한계를 라이브 무대상 - 섬세한 편곡 작업과 장르 변이 시도 - 에서 극복해오던 이승환은 [HUMAN]을 계기로 여분의 아쉬움마저 극복한 듯 보인다. 앨범의 확장된 스케일 덕분에 소박함과 얌전했던 그의 정서를 지지하던 일부 팬들의 당혹감은 컸었고, 'Fire Side'라 명명된 후반부의 곡들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팬들도 분명히 있었다. 메틀 키드 세대의 자의식과 소년적 감수성이 뒤엉킨, 존재감 자체가 아이러니였던 이승환은 차츰 그런 이면들을 분리할 수 있는 지혜를 체득했고 앨범 구성에 있어 수록곡의 분위기를 양분해내는 첫 시도를 해낸다. 이런 구성은 훗날 발매된 [The War In Life]와 더블 앨범 [Egg]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다만 [HUMAN]이 각각의 분위기를 긍정해달라는 팬들을 향한 첫 시도였다면, 본격적인 더블 앨범 [Egg]는 각각의 분위기를 취사 선택해달라는 - 신구 팬들 모두를 포용하기 위한 - 장치에 가까웠다.
작곡가 김동률 본인조차도 편곡에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천일동안', 정석원의 통통 튀는 아이디어가 고스란히 자리잡은 '악녀탄생', 신성 유희열의 '변해가는 그대'가 주는 잔잔한 여운 등이 이 앨범 속 음악친구들의 공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실로 [HUMAN] 앨범을 관통하는 음악의 주인은 진정 이승환이었다. 그는 이 앨범으로 인해 통제력을 지닌 앨범 아티스트의 자리를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내가 바라는 나', '멋있게 사는거야', '너의 나라', '지금쯤 너에게'가 주는 진심은 눈길을(귓길을?) 거두기 힘든 힘이 있으며, 그 목소리의 결을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성취의 성공은 [HUMAN]이 '팝 사운드 추수적'인 음반이 아닌 '팝 사운드' 그 자체를 실현한 음반의 탄생임을 목도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HUMAN]의 존재감 보다 중요한 사실은 '과연 이승환이 [HUMAN] 이후 과연 어떤 앨범을 내올 수 있을 것인가?'하는 부담감 서린 질문이었다. 그 대답을 기다리기 위해 음악팬들은 약간의 기다림을 가져야 했지만 되돌아보건대, 이 앨범은 이승환 '걸작 3부작'의 첫 시작이기도 했던 것이다. [061031]/[0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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