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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낯선, 죽음에 대한 언사

trex 2011. 3. 11. 10:16
+ 한겨레 웹진 HOOK에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23534

만연하는 죽음의 소식들 앞에서 하루하루가 멍해지는 요즘이다. 소급하자면 전직 대통령 두 분의 죽음이 그랬고, 가깝게는 어린 시절 봤던 소년지의 화백들이 세상에 붓을 놓고 떠났을 때도 그랬다. 사상의 스승 리영희 선생님에서부터 영국 출신의 영화배우까지, 매일 접하는 부고에 내가 기어코 한 세대가 저무는걸 목도하고야 마는구나하는 실감과 앞으로의 아찔한 소식들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트위터 타임라인과 RSS로 구독하는 블로거들의 글들에도 추모의 행렬을 연일 이어지고 있다. 잇따른 거인과 거장들의 죽음 뒤에 얼마나 더 추모해야 하며, 남아있는 지금의 사람들과 시시하고 하찮은 인생을 공유하고 살아야 할까. 난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요새 문득 하는 고민들이다.

그러던 중 일간지 한겨레의 글 ‘곽병찬 칼럼 – 아주 낯선, 죽음의 풍경들’을 읽게 되었다. 제목에선 아득한 동감이 느껴졌다. 요즘 시대를 다소 비관적으로 설명하자면 ‘거대한 군병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릿한 소독약 내음이 공기를 똘똘 감싸 안은 채, 창백하게 연명하는 수많은 삶의 동지들. 그들과 여행이니 공연이니 하는 즐거움의 단어를 나누지만, 찰나의 즐거움은 잠시. 묵직하게 누르는 삶의 현실 감각은 우리를 어쩔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이게끔 한다. 자본주의의 총탄과 포성이 오가는 현장에서 우리는 시가전을 치르고, 그러다 문화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밟고 처세를 획득한다. 그러다 간혹 들리는 동료와 윗 세대들의 부음에 잠시 절망하다 다음날 또 다짐하듯 군장을 꾸린다.

편집인 곽병찬씨의 글은 나와는 다른 구체적 현실 감각에서 나온 것일테다. 그의 문장에도 있듯이 그가 향한 시선은 구제역으로 황폐화된 농가를 망연자실하게 볼 수 밖에 없는 이들의 눈물, 젊은 나이에 노동의 가치를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사회적 죽음을 당한 이들, 그리고 가족들의 눈물들에 향해 있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바로 지금 이 시각, 이 땅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질문이나 할 수 있겠냐는 시대적 근심이다.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한겨레가 일관되게 우리 사회를 향해 물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읽어가던 글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그만 숨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난 여기서 최고은씨의 죽음과 그로 인한 가족과 동료들의 슬픔을 다시 소환하는게 두렵고 심지어 죄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충분히 대변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이고 이미 HOOK을 위시한 수많은 곳에서 그녀의 직간접적인 동료들이 예를 표하고 그녀를 추모하였다. 그럼에도 굳이 저 대목을 인용하며 편집인 곽병찬씨에게 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일단 곽병찬씨는 최고은씨의 일에 대해 사회적 죽음이라는 인식이나 공감대가 없는 것일까. 최고은씨의 일 역시 대중문화산업의 층위에서 벌어진 사회적 죽음이자 비극이라는 생각은 없는 것일까. 혹시나 그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보도상의 사실은 서로간의 위계 차이가 있는 것인가. 최고은씨의 일이 그의 글에서 표현된 ‘연예인 명망가의 죽음’ 같은 위계로 취급될만치 다른 더 중요한 이슈들을 가리는 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설마 최고은의 노동과 그가 비통해하는 노동(자)들의 죽음은 구별되는 것인가. 최고은의 일을 슬퍼한 동료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구제역 농민들과 투쟁 노동자들을 근심하지 못할 정도로 박약하다고 믿는 것은… 그렇다. 설마 그렇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슬픔이 그토록 ‘낯선가?’

무엇보다 한 대중문화 노동자가 감당했어야 할 현실적 처우와 건강상의 여러 이유로 극단적 환경에 몰린 사실을 두고, 피자 배달을 운운한 것은 지나쳤다. 곽병찬씨는 농민들의 눈물을 보고, 타협을 거부하는 노동자와 가족들을 보고, 빠듯한 주문에 밀려 오토바이를 몰다 비명횡사한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생에게 ‘차라리 그럴 바엔 다른…’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언론 이곳저곳에 거론되는 과정에서 나온 추모의 언사들이 낯설다고 표현하기 위해, 이런 일이 벌어진 과정에 대해 지나치게 표면적으로만 인식한 것은 아닌가?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일상인으로서의 예의 범주를 벗어나, 그것이 언론인으로서 표명할 수 있는 바른 입장인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노파심이나 근심이려니 하겠지만, 곽병찬씨가 혹시나 전언한 노동자들과 최고은씨 같은 대중문화산업 종사자 노동자들을 다른 위계 또는 다른 충위로 보지 않길 바란다. 최고은씨의 일이 그보다 더 중요하고 세상에 시급히 알려야 할 비극적 사건들을 가렸다고 하지 말길 바란다. 그녀의 죽음 역시 우리 앞에 지금 만연한 사회적 죽음, 그것에 다름 아니다. 한 여자 연예인의 죽음이 다시금 소환되어 우리에게 양심과 법의 재단을 묻는 이 때에, 각기 다른 죽음들을 위계에 놓는 것은 지나치게 잔혹해 보인다. 그 서로 다른 죽음들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것이 언론의 참 존재 이유가 아닐런지. 무엇보다 한겨례는 최고은씨의 죽음을 두고 작은 물의(?)를 일으킬만치 독자들에게 인상적인 환기를 시킨 곳이다.

곽병찬씨가 말한 ‘인간의 존엄성, 인간성의 고결함’이 무엇보다 위협받는 이 세태에 더더욱 실감한다. 이 죽음의 풍경 앞에 예의와 외면하지 않는 시선이 동시에 필요함을 말하고 싶다. [1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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