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5화 본문
20회라는 턱에서 넘어갈랑말랑하는 [노래 한 곡과 A4지 한 장]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기획.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입니다. 이 시리즈는 한 사람의 청소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음악 편력기를 통해, 취향이 한 인간의 성장과 사고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 아닌 그냥 글을 써서 흔적을 남기는 성질머리의 한 예시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연재물을 통하여 이문세, 뉴키즈온더블럭, 건즈앤로지스, 신해철, 마를린 맨슨, 툴 등의 다양한 뮤지션들을 알차게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적기엔 너무나도 죄송할 뿐입니다. 아무튼 시작합니다.
+ 음악취향Y 게재 : http://cafe.naver.com/musicy/13708
[지난회 줄거리] 바비 브라운, 뉴 키즈 온더 블럭을 필두로 팝 넘버 등을 몇 가지 구매한 조용한 중학생은 이문세의 6집으로 이문세와 결별하고, 뭐가 어떻게 되지는도 모르는 상태에서 졸업을 앞두게 된다.
2011/04/22 - [음악듣고문장나옴] -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1화
2011/04/26 - [음악듣고문장나옴] -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2화
2011/04/29 - [음악듣고문장나옴] -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3화
2011/05/02 - [음악듣고문장나옴] -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4화
- 이제 이어서 고등학교 당시 이야길 해야 하는데 잠시 시간대를 옮기겠다. 다시 국민학교 시절부터 빈번하게 놀러간 사촌누나네(밀양 큰댁) 이야기다. 어쨌거나 내 음악 듣기의 원형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고, 현재 취향을 떠나서 지금도 이곳에서의 음악들이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에 마저 적고 넘어가고자 한다.
2명의 사촌 누나들은 자유분방함과 유머 감각이 있었지만, 무시무시한 폭군 아버지(즉 나에겐 백부님) 밑에서 숨 죽이며 지내야 했었다. 음악 듣기와 [리더스 다이제스트], [스크린] 잡지 구매 같은 것들로 아마 그 욕구를 발산했던게 아닌가 한다. 누나네 방을 좋아했다. 뭔가를 읽기를 좋아했던 - 흉악스러운 그림만 없으면 상관 없었다 - 나에게 [리더스 다이제스트]. [스크린], [여학생], [학생중앙] 같은 잡지들은 고마운 볼거리였고, 누나네 방에선 볼리비아에서 왔다던 가수 임병수의 노래가 울리곤 했다.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당시 읍내라고 칭해지던 시내(당시엔 밀양시가 아니라 밀양읍이었으니까) 레코드점엔 신청곡을 적으면 테이프로 떠주는 서비스가 유행이었고, 누나들도 그런 구매자들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펫샵 보이스(!), 런던 보이스들의 노래가 롤러장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대였고, 그 방의 BGM도 자연스레 그들의 노래였다. 하지만 누나들이 정작 애정을 바치던 상대는 두구두구... 아하(A-Ha)와 듀란듀란(Duran Duran)이었다. 왬(Wham!)도 조금 아슬아슬했다.(ㅎㅎ) 외모 앞에 무적 없다. 아니 외모 자체가 무적이었다. 아님 정말 목소리가 환상적으로 새끈하던가. 이 기준이 있었기에 제럴드 졸링은 합격이었고, 이들보다 약간 뒷 세대였던 릭 에슬리 등도 합격선에 통과할 수 있었다. 내가 봐도 듀란듀란(Duran Duran) 같은 외모 멤버 구성은 앞날에도 뒷날에도 없었던 것 같다.
우연찮게도 [스크린]지가 안겨준 지식(?) 덕에 내게 듀란듀란은 [007 뷰투어킬]의 주제가 주인공, 아하는 [007 리빙 데이라잇]의 주제가 주인공으로 인식되었다. 나도 좋아한 동명의 넘버들이었다.
이상은과 이상우의 운명을 나누게 한 것은 MBC 강변가요제
대상과 금상 수상이었고, 86년 대학가요제 두 남자의 운명을 나누게 한 것도 대상과 금상 수상이었다. 86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자 유열, 금상
수상자 이정석. 이 두 남자 싱어는 나란히 87년도에 1집 앨범을 발표하였으니, 그 목록도 누나네 방에 있었다. 내가 맘에 든다고 누나들에게
말한 노래는 처음엔 이정석의 '사랑하기에' 쪽이었다. 그런데 뒤에 나이를 먹으니 유열의 '가을비'가 더 좋았다고 느낀 기억도 난다. 오늘 새삼
찾아 들으니 참 근사한 노래였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찾아 들으시는 것도... 유열의 경우 훗날 이수만, 이문세와 더불어 '마삼 트리오'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내게 있어 왠지 이정석과의 관계로 더 인상적으로 떠오른다. 훤칠하고 미소가 얼굴에 박힌 유열과 뭔가 좀 소심하고 유약해
보였던 이정석, 확실히 대비되면서도 서로 보완되는 이미지였다.
점점 음악을 사듣고, 레코드점에서 녹음 테이프를 떠오는 것보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게 재밌어지는 나이대(...)에 진입한 두 누나들은 이후 LP 위주로 간간히 구매하기에 이른다. 음악에 대한 애정은
조금 줄어들고, 소비는 다소 어른의 패턴으로 굳어갔달까. 카세트 테이프만한 신속함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영속과 수집의 의미에 가까운 LP들. 그중
누나들이 아끼는만큼 나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두 개의 타이틀이 있다. 하나가 이치현과 벗님들의 6집(88년)이고, 나머지 하나가 공일오비의 3집
[The Third
Wave](92년)이었다. 지금은 잘 모를 수 있겠지만, 당시 이치현과 벗님들의 '짚시여인'(표기가 '집시여인'이 아니다^^;)이 일으킨 공전의
히트는 대단한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 공일오비의 저 3집이 보여준 반응은 뭐 달리 설명이 필요한거 같진 않다. 공일오비의 저 앨범은 어떤
식으로든 90년대 개막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아닌가 한다. 아무튼 2장의 LP만큼은 자주 플레이어에 돌았고 나에게도 진하게 남은 듯 하다.
지겹기도 했지만 이미 어떤 식으로든 취향을 넘어서. 공일오비 쪽은 박선주의 목소리가 내게 박힌 첫 앨범이기도 하다.
사촌누나네 방은 특별했다. 다른 이종사촌네(마산) 방에도 [스크린]지는 있었지만, 웬걸 거기서는 그 잡지를 못 보게 하였다. 이유는 내가 너무 어리다나. 큰댁에서 되는 일이 외삼촌님 댁에서 안되는 이유를 당시에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래도 사촌누나네가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은 듯 하다. 그곳에서 본 '웃음은 명약'류의 텍스트와 '헐리우드 리포트'풍의 기사들, 그리고 숱하게 들은 유로 댄스 트랙과 발라드들. 그게 내 유년에서 청소년기로의 진행과 기억이었다. [110504]
[6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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