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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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줄읽고로그남김

가지가 싫다 / 가지가 좋다

trex 2013. 4. 8. 13:11

가지를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지를 잘 못 먹는다. 아예 못 먹는다 정도가 아닌게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애써 찾아서 먹진 않는다. 나말고도 이런 사람들이 제법 되는 것으로 안다. 이유도 대개는 비슷할 것이다. 강수지가 살며시 다가왔다고 노래한 ‘보랏빛 향기’ 대신 ‘보라빛 몸통’과 몸통 안에 무엇이 담긴지 알 수 없는 물컹함의 겸비라니. 왜 이런 존재가 인간들의 찬거리가 되어 나같은 나머지 인간들의 고행거리가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가지가 싫다.


가지란 녀석은 어디서 살펴보면 고혈압에도 좋고 항암 작용도 한단다. 반면 어디 다른데서 검색해서 보면 가지는 94%의 수분과 1%의 단백질만 있어 영양학적 가치가 별로 없단다. 어느 장단에 맞춰 가지를 위한 춤을 춰야 하나? 타 개체를 위한 이로움으로 무장해 세상에 뿌리내린 생명체들도 따지고 보면 지구상에 그렇게 수적으로 많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겠지만, 확실히 94%의 수분의 물컹한 몸통을 지닌 가지란 놈은 섬칫한 구석이 있다. 반질한 외양과 확연히 대비되는 ‘익지도 않고 썩지도 않은’ 속사정을 보자면, 야채계의 ‘시체애호’ 아이콘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계속 이렇게 적다간 애호가들이 던진 가지 곤봉들이 부메랑처럼 뱅글 돌며 내 뒷통수에게 난타되리라. 사람들은 나와 달리 가지를 이래저래 잘도 드시는데, 볶아서 먹기도 하고 조림도 하고 튀겨서도 먹고 구워서도 먹는다. 가을 자지, 아니 가을 가지는 며느리는 손도 못 대게 하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다른 계절에 비해 떫은 맛이 한결 덜한 가을 자지, 아니 가을 가지만의 실속을 말하는 것이렸다. 그렇다. 고기 육질과 참치 뱃살 같은 강자에 비해선 경쟁력이 한참 부족하겠지만, 가지 역시 인간 음식의 역사에서 나름 선호를 받았다면 받아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나같은 ‘겁쟁이’들이 가지의 매력에 흠뻑 빠져 배춧잎 흰살 베어먹듯 와삭 먹어치우는 반전이 쉽사리 생기진 않는다는게 문제일 뿐이다. 가지 고유의 몸통 빛깔이 이유든간에 물컹함이 장애 요소이든간에, 아니면 그냥 먹기 싫어서든 가지에 대한 거리감은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비애호가들은 빈약한 핑계를 담아 가지를 멀리 하고, 차곡차곡 쌓아올린 핑계들은 어느새 두툼한 마음의 장벽이 되었다. 어쩌면 그 장벽이 가지만의 컬트적 가치일지도 모른다. 한편 밥정 쌓아 보겠다고 식당에 동행한 소개 대상에게 이렇게 대뜸 물어보아도 좋은 테스트가 될 듯 하다. “가지 좋아하세요?”


가지가 좋다.


이런 나조차도 좋아하고 소비하는 가지가 생겼다. 최근에야 알게 된 가지이고 섭취하는 맛이 있다. 짐작하겠지만 광장시장에도 홈플러스 마트에도 동네 번개시장에서도 취급하지 않는 가지다. 다름아닌 구로다 이오우의 단행본 [가지]이다. 낯선 이름이라고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실 분들이 적지 않을 듯 하다. 나 역시 이 작품으로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됐으니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단행본 [가지]는 상과 하, 두권으로 출간되었다. 각 권은 보랏빛 가지와 함께 등장인물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데, 당연히 가지보다 인물들에 중점을 둔 작품들이 실려 있다.


설명하자면 매회 가지가 등장하는 규칙은 지키지만, 각 단편들은 느슨하게 가지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고 SF/역사극/자전거 경주/첩보영화 패러디/청춘물/인간군상 드라마들로 자유롭게 나열되어 있다. 각 권의 큰 줄기를 이루는 주요 등장인물 몇몇은 분명히 있기는 하다. 지식인풍 귀농 중년, 채심꾼 때문에 가출한 아버지를 둔 여중생 가장, 프리터의 삶을 택한 청년과 그의 동년배 여자, 그리고 이런 그들 주변에 위치한 불면증 여성 지인, 가출 청소년, 남자 후배 등등이 매 작품마다 슴슴한 맛의 양념마냥 배치되어 이야기를 느슨하게 이어간다. 몇개의 단편은 아예 이런 줄기와 아무 관련없는 나즈막한 결론으로 매듭짓기도 하다.


구로다 이오우의 작품 속 유머 감각은 일종의 하이쿠 같다고 해야 할까. 굉장히 싱거운 맛도 있다가 어땐 때는 제법 의표를 찌르는 맛도 있다. 전반적으로는 인간 긍정의 기운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어떻게든 되겠지요 라고 흘리는 듯한 이야기 속에선 때론 삶의 비수도 숨어있다. 가출 후 유흥가로 흘러가는 여학생의 이야기, 삶의 보물찾기 운운하다 청부업자들에 의해 시멘트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중년의 이야기들이 남기는 떨떠름한 맛 역시 지우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면증 여인은 치유되어 가고, 여중생은 복권에 당첨되고, 프리터 청년은 가지의 원산지 국가 중 하나인 인도에서 삶의 소동을 거친다. 여기엔 묘한 낙관의 기운이 분명히 흐르고 있다.


[가지]에 담긴 이야기들을 일일이 풀기엔 지면이 넘치고, 문장으로 풀기엔 싱거운 것들 투성이다. 펜으로 그리다 붓으로 그리다, 심지어 몇몇 에피소드들의 그림 함량은 의심스러워 보일 정도로 진폭도 다소 심하다.(독자인 입장에선 붓으로 그린 작품들이 흡족하다) 그런데 상하권 모두 읽으면 얼개가 맞춰지고 비로소 완독했다 싶은 기분이 든다. 다시 들춰보게 되는 맛은 냉장고 속 양념 잘 배인 반찬 생각으로 밤 11시 쌀밥 반 공기의 유혹을 누르는 기분에 못지 않다. [가지] 괜찮은 작품이다. 접해보시길 권해본다.


[가지] (상)(하)권 / 구로다 이오우 작 |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이 단행본에서 제일 유명한 에피소드인 [나스(가지) 안달루시아의 여름]과 [나스 수트케이스의 철새]는 이후 애니메이션화 되기도 했는데, 지브리에서 작화 감독으로 활동한 바 있던 코사카 기타로 감독에 의해서였다. 원작자 구로다 이오우의 화풍과 관련없이 우리가 흔히들 인식하는 소위 ‘지브리 그림체’에 의한 작품이라 오해도 있었는데, 정작 제작 회사는 매드 하우스라고 한다. 하지만 일본 현지에서도 매드 하우스가 아닌 지브리 DVD 코너에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 이 단행본으로 인해 당장에 가지볶음 등을 먹을 수 있겠다 자신감이 생긴건 아니다. [130407]



= 웹진 다시에 실었습니다 : http://daasi.net/?p=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