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일상의 반창고, 마스다 미리의 작품들 본문
기성 세대가 보기에 SNS란 철없는 젊은 아이들의 불만투성 낙서장 쯤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속엔 어느 정도 세상의 진실들이 벽지가 되어 발라져 있는데, 특히나 한국 거주 2-30대 여성들의 토로들이 그렇다. 낮은 임금의 업무 환경, 대화에 대한 노력조차 질식시키는 상대방의 배려없는 언사들, 이런 것들로 점철된 일상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이 2-30대 여성들의 소리없는 비명들을 덮는건, 이들을 향해 세상이 함부로 규정하는 스테레오화된 박제풍 묘사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순대국밥 한 그릇값은 능히 나올 가격의 커피에 환장하고, 비싼 명품에 침 흘리고, 아무 이성에게나 마음 흘리고 때론 몸을 함부로 굴리는 화냥”의 이미지. 이런 여성에게 던져지는 강요와 힐난의 언어는 가히 폭력적이다. 미모를 가져라, 살을 빼라, 결혼 정년을 놓치지 마라, 처녀성을 지켜라, 여기에 간혹 ‘의무 입대를 하라’까지 덧붙이기도 한다. 이쯤되면 한국 거주 2-30대 여성들은 당면한 미래를 고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험난한 세상의 시선에 대한 고민까지 더블 패티가 된 거대한 햄버거를 어깨에 짊어진 셈이다.
해답은 아니겠지만, 마스다 미리의 만화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주말엔 숲으로] 3권은 제법 근사한 (자신을 위한)선물이 될 수 있겠다. 게다가 앞 2권은 세상살이의 살벌함에 가슴 졸이는 소심한 이들에게 제목부터 사무칠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그림체는 간결하다. 언뜻 보면 학창 시절 노트 한켠에 끄적인 팔다리 달린 사람 낙서마냥 간결하다. 그럼에도 이 단순한 그림체 캐릭터들은 우리의 고민과 멀지 않는 간절한 질문을 안고 동네길을 걷는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정말?”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엔 마스다 미리의 대표 주인공 ‘수짱’이 등장한다. 그녀는 한 카페의 매니저이고 비교적 차분한 싱글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직업으로 노년은커녕 중년 이후의 안정된 삶을 보장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수짱의 지인 ‘사와코’는 비슷한 연배의 언니이다. 큰 기복없는 일상이지만 반복되는 업무와 치매를 앓은지 오래된 노모가 있는 가정사 속에서 자신이 슬슬 마모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연애도 하고 싶고, 마지막으로 남자와 섹스한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의 등장인물 엄마는 7살의 딸을 가진 중년 초입 주부다. 가족을 위해 조용히 헌신해온 삶을 다시 되물을 시기가 되었다. 자신의 빛나던 시절에 대해 되새기지만 사실 그게 언제인지도 흐릿하다. 7살 아이의 고모인 ‘다에코’는 조카와의 대화에 어른식의 대답을 해준다. 고모도 젊은게 좋냐는 질문에 대한 다에코의 대답은 간결하다. “젊은 게 유리하니까.” 세상사를 이토록 차갑게 깨우친 다에코는 당연히 결혼에 대해선 적극적이지 않다.
마스마 미리의 이런 캐릭터들은 서로 간식이나 차를 나누면서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기도 하고, 간혹 상대방과의 비교되는 처지에 몸 속의 작은 부글댐을 누르며 조바심을 느끼기도 한다.(그리고 이내 후회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할퀴며 상처 입히는 것은 남자들의 배려없는 말들이다. 상대방을 같이 가정을 영위할 주체로써 보기보다는 가치관의 틀에 꿰맞춰 객체로 보는 듯한 언어들. 그렇다면 이 여성들은 연대하거나 포옹하며 화해하는가? 그렇진 않다.
차분한 그림체 안에서 작가는 등장 인물들이 숨쉬는 일상의 지속을 연장 상태로 놔둔다. 방관이 아니라 작가가 낳은 인물들을 세상의 흐름 안에 걷게 하는 것이다. 다짐을 하기도 하고, 변화를 꿈꾸기도 하고,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기도 하면서. 뒷걸음이나 처량한 자기만족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등장 인물들을 거리에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숨쉬는 동년배들’로 보이게끔 한다. 책장을 덮으면 그런 작은 뭉클함이 주어진다.
보다 낙관적인 자세의 작품 [주말엔 숲으로]도 흥미롭다. 도시 생활 반대편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품은 귀농하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생태주의자 코스프레하며 위선떨지도 않는다. 주인공 하야카가 한적한 시골 숲속을 택한 것은 거창한 의도가 아니라 ‘지금 이 시기’에 자신이 택한 가장 최적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하야카와 걷던 산보의 대화를 상기하며, 도시 빌딩 숲속을 주먹 쥐고 잇몸에 힘을 주며 걸어간다. 좋은 날은 간혹 있고, 나쁜 일이 있다면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
마스마 마리의 작품들엔 서로 다른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이 카메오처럼 잠시 등장했다 사라진다. 험한 세상이 던지는 시선과 대화로 인한 멍을 안으면서도 반창고 붙이고 약 바르고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일상들, 그리고 서로 교차하는 동지들. 현실 세상의 독자들에게도 이 작가의 작품은 반창고 이상 쯤은 될 것이다. [130310]
+ 한겨레 HOOK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48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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