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어서 와. 건프라 취미는 처음이지? 본문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ㅂ진 않지만,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ㅇ…도 아니지만, 온 몸을 유니클로로 장식한 나는 양재역 3번 출구 부근 카페 파스쿠치에서 황송스런 소개팅을 하고 있다. 탕비실에서 옷자락이라도 스칠까 두려운 디자이너 예대리를 제외하고는 여성이라는 개체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나로선, 건너편 알토톤의 28세 여인이 존재만으로도 경이로울 뿐이다.
문제라면 나는 달변가가 아니고 – 굳이 말하자면 체내에 이물질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사는 숙변가에 가깝다 – 소개팅 상황별 시츄에이션에 익숙치 않다는 점이었다. 개발 다이어그램은 곧잘 만드는 편인데 말이지. 암튼 통성명이 오가고 가볍게(그리고 아스라이 너절하게) 신상 정보가 오고 갔고 세번째 순서로 자연히 서로의 취미 정보를 교환하였다.
“건담 프라모델 조립을 취미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이 소개팅은 이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멸망 이전의 파토.
청장년들이여. 취미를 가져라.
영화 보기? 이미 너무 많은 멀티플렉스가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영화 보기는 카페 가입이 필요한 정도의 전문적인 영역이 아니다. 취미라고 하기엔 계면쩍음도 적지 않다. 나는 [지슬]이 뭔지도 모르겠고, ‘슬’자 들어간 영화 정보라는건 딱 하나 거 뭐냐. 황보’슬’혜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만 안다. 이쁘잖아.
독서? 독서클럽에 가입했고 [위대한 개츠비]가 다다음주 토론 주제라고 열과 성을 다해 탐독 후 참여했는데, 나 혼자 피츠제럴드 말고 거 뭐지 강도영? 강도하? 암튼 그 사람 만화책 들고 나왔더라. 있잖나. 고양이가 사람으로 나오는 그 만화. 것 참. 강예빈이 표지에 나온 정기구독 [맥심]을 제쳐두고 읽고 나갔는데 그 허탈함이란! 누구에게 호소해얄지 모르겠더라.
음악듣기? 나 이래봬도 스쿨 밴드에서 베이스 잡았던 사람이었다. B612 ‘나만의 그대 모습’과 본 조비의 ‘레여핸좀미’ 같은거 진행 딱 꿰고, 메탈리카의 ‘블랙’ 앨범 앞에선 108배 하던 전력이 있던 사람이다.(얼터너티브 미워!) 무..물론, 지금은 토렌토에서 받아놓은거 바이러스로 날려먹어도 아깝다고 생각도 안할만치 음반이라곤 최근에 뭘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풋쉬풋쉬베이베…
하지만 건담 프라모델(이하 건프라) 취미는 제법 명징하다. 아는 척만으로 취미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이 취미는 일단 킷을 구매해야 하는 재화의 취미이고, 조립의 결과를 인증해야 직성이 풀리는 증거의 취미이다. 속일 수가 없다. 아- 하기에 따라서는 남을 속일 수도 있지만, 구차하게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 취미를 자랑하고 과시하는건 ‘어젯밤 부킹 결과’를 네이트톡에 남기는 것과는 거의 반대급부에 있다. 자족감과 소수의 동질감만으로 버티는 취미다. 부모님의 혀 끌끌과 명절 조카의 손아귀라는 아슬아슬함을 담보로 하고 – 위에서 읽어보면 알겠지만 – 이 취미를 연정의 대상에게 고백하는 일은 간혹 세계 멸망 이전의 파토를 야기하기도 한다.
매체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집요하게 ‘키덜트’라고 부르기도 하고, 도무지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때론 ‘오타쿠‘라기까지 명하는 경우가 있다. 간혹 이 분야에 소문난 연예인이나 치과의사 같은 유명인사(?)들이 거론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튼 대략적인 요지는 우리는 별종이라는 거다. 우- 우리는 별나지 않다! 실컷 조립해놓고 건담의 치맛자락을 살짝 올려 국부를 감상하지도 않고(…) 만들어놓은 킷에게 ‘-땅’이니 ‘-찡’하는 애칭을 달지도 않는다. 잠자리 옆에 눕혀 놓고 재우지도 않는다. 우리는 킷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로 그저 습기와 먼지에서 훼손되지 않기만을 기원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해심을 방패를 내세워 “로켓 펀치는 안 나가나요?”라고 묻지도 말란 말이다!
만약 빈궁하게 취미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처지라면, 그대 청장년에게 건프라를 추천해 본다. 물론 돈이 좀 든다. 피치 못할 일 아닌가? 연정 품은 대상이 싫어할 수도 있다. 그래도 누군 좋아하거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트랜스포머] 1편을 보며 나온 거리에서 지나가는 자동차가 변신하는 광경을 잠시라도 상상했거나, 유년 시절 친구 집의 로봇 장난감 목록을 부러워했던 원체험이 있거나, 하다 못해 토니 스타크의 ‘지속가능한 자립적 조립질’이 무진장 부러웠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다. 건프라 취미는 당신에게 맞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샌 본드도 안 쓴다. 진짜다. 조립하면 또각또각 딱딱 잘 붙는다!
잇츠 건프라이즘. 넌 이제 빠져 버렸어.
최근 몇년간 건담 세계관 또는, 프라모델 관련 저서들이 소폭이나마 자주 출간되는 추세다. 어느 정도는 이쪽 취미 계층들 확산되고 있고, 그들을 보는 시선도 ‘철없는 어른’에서 ‘몰입과 탐구’라는 전문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덕일 것이다.(물론 시선의 개선의 한참은 멀었다) 신간 [MG 건프라이즘]도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 맞게 출간된 책이다. MG, 소위 ‘마스터 그레이드’라고 불리는 일본 반다이제 건프라 등급의 킷들을 주제로 개발 역사와 에피소드 및 몇몇 자료들을 담은 책이다. 화려한 화보와 설정집을 기대하신다면 일단 구매는 금물, 대개의 정보들은 텍스트와 인터뷰가 대다수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취미에 입문 후 킷 구력(?) 1,2년째 정보를 깨우치는 단계의 이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하지만 흐릿하게 말하자면 건담에 대해 좀 아는 체는 가능한데, 건프라에 손을 댈까말까 간보고 있는 경계불명의 초심자들이나 뇌하수체 깊숙히 덕심의 뿌리를 내리신 존경하옵는 준전문가들 모두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엄청나게 새로운 사실 기술은 없을지언정 충실한 연대기적 구성에 업체와 업자 입장의 변명(ㅎㅎ)들도 확인할 수 있고, 원체 덕심이라는 것은 완성도 같은건 차치하고 이런거 하나쯤은 구비해두는 겸양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하.하. 이런 책들은 원래 “사라. 두 권 사라”라고 구호를 외치는게 한반도식 예의이다.(아 정태룡 선생)
어느 취미나 그렇겠지만, 한때는 엄청나게 화르륵 타올라서 소비도 치솟고 시간 대비 투자도 늘어나지만 그러다 금세 시큰둥해질 때가 있다. 건프라 취미 역시 그런 사이클에 대한 고민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본저는 그런 시점에 한번 복용해도 좋은 아이템이기도 하다. CAD 붙잡고 목업 다듬고 이걸 어떻게 프레임을 만들고 변신 시키나 고민 때리던 반다이 개발자들의 열정과 혼이 삐죽 튀어나와 그간 식은 나의 조립혼을 깨우게 하는 셈이다. 그 정도 효능은 충분하다. 더 중요한건 건프라를 취미로 염두해두고 있는 이들은 일단 먼저 조립하는게 우선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다. 책도 두 권 사고 킷도 세 개 조립해라. [1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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