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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xism : 렉시즘

지금까지의 황정은의 세계를 조성하던 혼미한 인상의 문장은 여전한데, 그것을 구성하는 이야기와 배경은 달라 보인다. 촛불이 채워지던 거리를 중심으로 두 편의 소설은 세운상가 - 청계천 - 광화문 광장 등을 오가며 기록과 인상을 새긴다. 매번 황정은의 소설은 세월호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죽음의 냄새를 드리우며, 부채감과 상흔을 남겼는데 보다 직접적인 호명과 언급을 꾹꾹 눌러쓴다. 그럼에도 안노 히데야키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오시이 마모루 [스카이 크롤러] 같은 서브 컬처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인문 영역 곳곳의 인용과 읽기 취향을 피력하며 지금 시대의 사유와 생생함(생경함?)을 남긴다. 정치와 혁명만큼 중요한 언급은 황정은 단편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일상 안의 폭력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압제들이다. 이..
블로그를 운영하다보니 뜻하지 않게 이 짧은 글 [원문]을 좀 더 보강해 잡지에 실었음 한다는 요청이 있어 응했습니다.잡지 [Chaeg] 1.2월호에 하단의 내용과 같이 황정은의 작품 [아무도 아닌]에 대한 글이 실렸습니다. 다른 독자분 3분과 함께 실렸는데, 세월호 이야길 한 제 입장에선 좀 너무 니같이/나같이 잡았다 싶기도 하구요. 아무튼 적었습니다!== 렉스 (음악 글쓰는 사람)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건, 2014년 4월 16일. 이날은 적지 않은 이들은 알고 있겠지만 예술가들에게 망연자실한 침묵과 더불어 여러 발언의 통로가 막히는 협심증 등의 증후를 주었다. 어디 예술가들뿐이겠는가. 이는 여러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발언해야 할 책무감을 씌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음악인들은 음악을 만들고… 문장가..
4월 16일은 예술가들에게 망연자실한 침묵과 발언의 통로가 막히는 협심증, 그럼에도 발언을 해야 할 책무감을 씌우게 한 계기가 되었다. 고통의 시간은 황정은 작가에도 주어졌을 것이다. [아무도 아닌]은 물론 세월호에 대한 단편집은 아니다. 그럼에도 세월호 이후의 모든 예술작품들이 그러하듯 그 징후를 발견하고자 하는 충동을 삼키기 힘들게 한다. 나의 진의가 그렇지 않을진대 그럼에도 삼키게 만드는 말과 움츠러들게 만드는 세상살이의 압제가 있고 - , - 모든 것이 복원하기 힘든 지경이 된 이후의 상실이 존재하고 - , - 죄책감과 힘든 되짚어보기가 있다.() 도처에 슬픔, 이곳에 죽음, 저곳에 상실이 있다. 황정은의 펜은 여전히 다다다다다다다 쉼 없이 잔혹하게 헤집는다. 그리고 누추하게 보이나 여전히 아름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기 전에 진작에 [파씨의 입문]으로 입문했어야 했다. 분명 특유의 리듬이 있으나 쉽게 타기엔, 초행으론 어려움이 있는 화법(파씨의 입문)과 동시에 환상성(옹기전)을 품고 있는 황정은식 세계관을 소설집이 고이 품고 있었던거다. 개인의 성장사와 맞물린 에피소드(디디의 우산) 모티브가 [계속해보겠습니다] 같은 장편에서도 살짜기 포함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망가진 가족과 근친의 관계망(야행夜行)에도 불구하고 지리하게 지속되는 삶의 감각(낙하하다, 묘씨생猫氏生)이 보다 적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다부짐은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처연한 절망과 돌연의 순간보다 따스한 호흡을 가지고 있다. 계속해보겠습니다국내도서저자 : 황정은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4.11.05상세보기 파씨의 입문..
정작 작가가 아닌 팟캐스트 진행자로서의 황정은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왔다. 늦기 전에 한 줄이라도 읽어야겠다 싶어 집어 들었다. 모처에서는 '포스트 IMF 세대'라는 이름으로 작가를 비롯한 몇몇의 이름을 묶은 모양인데, 당사자들로선 당혹스럽겠다 싶다. [야만적인 앨리스씨] 역시 개발 보상비를 둘러싼 황무지 '고모리'(가상의 동네이다)의 풍경이다 보니, 이문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 어른들의 욕망이 노출되지만 이걸 '포스트 IMF 세대' 의식으로 묶을 것은 아니다 싶다. IMF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이라는 근원이 사람들이 먹고 사는 거처를 황폐화시키고, 연약한 아이들을 오염된 흙 속으로 묻게 만드는게 아닐런지. 자본은 IMF 이전부터 언제든지 그래오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뒤덮는 문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