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How to Destroy Angels 『How to Destroy Angels』: 나인 인치 네일즈 이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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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Destroy Angels 『How to Destroy Angels』: 나인 인치 네일즈 이후.

trex 2010. 7. 17.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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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Destroy Angels 『How to Destroy Angels
www.HowtoDestroyAngels.com에서 프리 다운로드 발매.

01. The Space In Between
02. Parasite
03. Fur-Lined
04. BBB
05. The Believers
06. A Drowning


찰스 맨슨이 샤론 테이트를 무참하게 살해한 테이트 맨션 안에서 스튜디오를 차리고, 악몽에 가까운 영감을 흡수하던 시절의 트렌트 레즈너? 이미 그는 『The Fragile』때 세상 바깥으로 손을 내밀지 않았을까. 좀 지지부진한 감은 있어도 ‘진심을 그대에게’ 내보이던 몇몇 트랙들은 앞날의 트렌트 레즈너와 훗날의 트렌트 레즈너를 가른 중요한 순간의 증거가 되었다. ‘지옥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기조의 무시무시한 트랙들은 뼈대를 남긴채 불판의 온도를 내린지 오래였고, 적당히 뮤지션 중후반기의 수작으로 기록되었을 『Year Zero』에 멈췄어도 좋았을 행보는 전혀 뜻하지 않게 ‘프리 다운로드’ 연작 - 물론 정식 패키지로도 별도 발매 되었다 - 『Ghosts I-IV』, 『The Slip』으로 이어졌다.

더욱 아연한 것은 엠비언트풍의 일렉음과 심장에 손가락을 대는 건반음으로 빼곡한 연주 앨범 『Ghosts I-IV』 그 자체였다. 의중을 알 도리 없는 사막 바람 같은 황량함, 절대 결산식의 정리라고 볼 수 없을 번외적인 성격은 앞으로의 그의 행보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불안의 원인이 된 몇몇 발언들, 가령 ‘앞으로는 게임 쪽에...’ 같은 언사들을 볼 때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내놓고 그냥 가버리면 안된다는 심정, 우리가 앞으로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을 존 카멕 같은 양반들이 만든 게임 등에서만 들어야 하는건가라는 불안감이 분명 있었다.(난 그럴싸한 콘솔 게임기도 없고, 데스크탑도 없단 말이야!)

공식 사이트에서 일련의 공연 촬영 UCC, 트랙 리믹스 UCC를 마음껏 허락하며 진열하던 그의 소식통에서 또 하나의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웨스트 인디언 걸’(West Indian Girl) 소속의 ‘마리퀸 만디그’(Mariqueen Maandig)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소식이었다. 지옥 딴스홀 DJ가 뒤늦은 추종자들을 저버리고 백조들이 춤추고 노니는 세상으로 떠나는건가 싶었다. 물론 그럴리는 없었고, 먹고 살다보니 ‘How to Destroy Angels’라는 이름의 결과물도 어느샌가 다가왔다. 조금 직적접으로 들리는 밴드명 ‘How to Destroy Angels’은 그와 부인, 그리고 일련의 영화작업으로 이름이 알려진 아티스트 ‘앤티커스 로스’(Atticus Ross : 최근작은 댄젤 워싱턴의 [The Book of Eli]) 이 세 사람이 규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될지 알순 없지만 일단 첫 EP는 6곡의 내용을 담고 프리 다운로드의 형태로 출반되었다.

아무래도 『Ghosts I-IV』, 『The Slip』에서의 경향이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데, 마리퀸 만디그의 보컬이 앞장서다보니 나인 인치 네일즈 당시보다 농밀함의 밀도가 어느 정도 있다. 불안하게 눌린 사운드와 강박적인 박자, 그 안에 스며든 그녀의 보컬은 확실히 트렌트 레즈너의 보컬과는 다른 것이며 다행스럽게도(!) 환상적인 분위기보단 스산한 저음으로 ‘돌아온’ 디스토피아를 묘사한다. 다행이지 뭔가. 난 엔야를 들으러 플레이를 켠게 아니니까. 박살난 관계와 찰나의 폭력이 일으킨 참혹한 참상을 무덤덤하게 그려내는 「The Space In Between」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이 밴드가 그려내는 풍경이 정서적으로 확실히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살다보니 트렌트 레즈너가 부인과 함께 음산하게 노래를 부르는 것도 듣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이다.(「Parasite」)

「Fur-Lined」의 경우엔 아예 마리퀸 만디그가 아닌 트렌트 레즈너가 부르는 버전까지도 제법 상상하게 정도로 (어쩔 수 없이?)나인 인치 네일즈 근작들과의 유사성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앨범 전체가 ‘How to Destroy Angels’를 재탕 밴드라고 폄하할 수 없을 정도의 믿음은 심어준다. 사실상 수록곡 전반의 기초는 『Ghosts I-IV』, 『The Slip』 당시부터 다져진 듯 하다. 잘 부른다고 하기엔 분명히 무리가 있었지만, 건조함과 올곧은 성실함(?)으로 여지껏 나인 인치 네일즈의 세계관을 대변하던 트렌트 레즈너의 보컬과 다른, 새로운 정서의 그녀의 보컬은 일종의 가능성이다. 숨통을 조여드는 사운드와 교란을 낳는 효과음 사이에서 흘린 듯한 저음을 연신 깔아놓은 연출은, 여전히 그들이 백조떼 대신 시체를 쪼아대는 기분 나쁜 스케빈저들을 반길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준다.

게다가 익숙한 작사법과 함께 안개 저편의 막연한 불안감을 뭉클한 환상성으로 인도하는「A Drowning」은 이들의 새로운 라이브와 정규반을 기다리게 만든다. 신경을 불편하게 건드리는 악몽과 미열에서 아직 깨기엔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맙게도. [10/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