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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간디'와 유희의 지속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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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간디'와 유희의 지속

trex 2010. 10. 28. 11:37

* 한겨레 웹진 HOOK에 게재

http://hook.hani.co.kr/blog/archives/14667    


    게임 타이틀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가 5편 들어서 화제다. 1991년, IBM PC 타이틀로 1편이 첫 공개되었던 본작이 유독 5편 들어 네티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만큼 세월의 풍화만큼 급변한 인터넷 환경을 환기시킨다. 게임 타이틀이 공개되고, 구매 인증샷이나 스크린 캡처샷이 나돌고, 공략 쓰레드나 비전문적이되 집요한 리뷰 쓰레드가 웹에 차곡차곡 쌓이고 평가가 오가는 것은 다른 게임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의 문명5](이하 [문명5])가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과정은 조금 다른 듯 하다. 사건의 중심에는 소위 ‘문명 간디’라는 캐릭터와 ‘…하지 않으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같은 유행어의 속사정이 있다. 

    개발자이자 프로듀서인 시드 마이어를 명장 반열에 올린 타이틀 [문명] 시리즈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플레이어가 세계 주요 지도자 캐릭터를 선택한 후 자신이 원하는 문명의 방향성으로(가령 과학이나 개발 지향, 정복 지향 등) PC의 인공지능이나 다른 플레이어와 경쟁하는 게임이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역사적 지식과 교섭력을 습득하게 된다. 주요 지도자 캐릭터의 전기상의 기록이나 세계지리 풍의 상식들을 알 수 있으니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도 학부모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유효하다. 그렇게 5편에 이른 [문명] 시리즈는 당연히 그래픽과 사운드, 각종 효과 등이 버전업 되었고 이제는 교육적 효과보다는 ‘중독성’으로 그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한국어 설정이 없어 한글 버전 패치를 위해 투입한 개발자와 팀장이 중독성 때문에 ‘실종’ 되었다는 우스개가 트위터를 타고, 이제 [문명5]를 플레이 하는 행위 자체가 ‘▶◀ 문명하셨습니다’라는 블로그 이웃들의 선고를 받는 말놀음이 되었다. 엄숙하고 침울한 장례식의 의례는 게임의 중독성을 부각시키는 상호소통의 유희가 된 것이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들이 [문명5]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세기의 베스트셀러가 될만치 맹위를 떨치는 판매량은 아닌 탓에 “했다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인데, 도대체 돈 주고 샀다는 사람들은 볼 수가 없네”라는 탄식은 여기저기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난데없이 [문명4]의 사운드트랙 ‘바바 예투’를 작곡한 크리스토퍼 틴도 곤혹을 치렀다. 그의 홈페이지에 방문한 ‘예의없는’ 한국인 네티즌들이 음원을 ‘대가 없이’ 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미성숙과 충돌을 빚는 현재의 풍경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말 많고 웃음 많고 탈 많은 게임 타이틀도 오랜만이다. 여기에 ‘문명 간디’의 유행이 불을 제대로 지폈다. 어느 네티즌들이 게임을 진행하다가 발견했다는 상대편 진영의 간디의 대사 “옥수수와 다이아몬드를 교환하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가 캡처샷과 더불어 여러 네티즌들의 폭소를 자아낸 것이다. 덧붙일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간디의 이미지는 명확하다. 인도 독립 운동의 대표적인 이름이자 비폭력 저항주의자로 인식된 그가 게임 상에선 정복 성향에 의해 ‘말도 안되는 협상을 제안하는 옆나라 폭도’로 탈바꿈한 것이다. 여기에 네티즌들의 말장난이 가세하였다. 비폭력 저항주의는 ‘Be폭력 저항주의’가 되었고, 간디를 캡처한 얼굴샷은 [GTA4](플레이어가 갱이 되어 드넓은 도심에서 자유롭게 탈법과 총격 등의 행위를 할 수 있다) 등의 다른 게임 타이틀에 합성되어 숱한 짤방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제 블로그 커뮤니티와 트위터에서 ‘…하지 않으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종의 유행 관용구가 된 것이다.



    이렇게 유포된 합성샷과 유행 짤방을 만든 이들이 간디가 원래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익숙하게 인지하고 있는 캐릭터와 게임상의 대사가 빚어낸 ‘괴리’에 즐거움을 발견한 것이다. 그 덕분에 합성샷과 유행 짤방은 그 ‘괴리’를 극대화하는데 주력한다. 김성모 만화의 폭력씬, 게임 스트리트파이터4의 인도 출신 격투 캐릭터, 심지어 싱어송라이터 유희열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합성 소재가 되었다. 특히나 유희열의 경우는 본디 슬림한 그의 체형과 ‘…하지 않으면, 유희열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장난이 어우러져 유희의 극치를 보여준다.(당사자의 입장에선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괴리’에 의한 유희들은 이제 ‘연상’과 ‘동일화’를 만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선 이미 예정된 합성샷이기도 하다. 꼬장꼬장한 어르신들 입장에선 이 무슨 지나친 장난이냐고 꾸짖을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치인과 유명인을 상대로 한 짖궂은 합성 놀음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며 집권당 당사자들이 [F4](꽃보다 남자) 합성 놀음을 한 전력도 있었다. ‘문명 간디’와 대통령/4대강 이슈가 만날 수 있었던 접점은 ‘괴리’가 아닌 일종의 ‘연상’ 작용에 더 가깝다. 우연찮게 인물 뒷편으로 흐르는 거대한 하천, 교섭과 대화라기 보다는 일방 통행에 가까운 대사 처리까지, 이것은 네티즌들 정서에 은연중 자리잡은 현 정권과 청와대에 대한 이미지를 반영하는 듯 하다. 사람들에 따라선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근거와 합리적인 언사만이 반대하는 상대에게 할 수 있는 비판의 방법론이라고 하겠지만, 간혹 이런 유행적 유희와 조소들이 진한 설득력과 공감대를 낳는 경우가 있다.

    명확하거나 명징하지는 않아도 지금까지 차곡차곡 누적된 현 정권과 청와대의 숱한 언행과 이미지들은 ‘문명 간디’를 인용한 조소로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언젠가는 유희가 아닌 발산을 벼르고 있음을 예고한다. 대통령의 경선 후보 당시 발언인 “자부심 없는 사람이나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고 노조를 만든다”로 대변되는 적대적 노동관과 ‘반’친시민적 발상, 조현오 경찰총장의 “음향대포 사용의 국민적 공감대 형성 위해 노력” 발언으로 드러난 언어 구사 능력 부족, 민간인 불법사찰의 청와대 개입건에 대해 함구와 수사축소로 노력하는 검찰의 태도 등 하루하루의 뉴스들이 우리를 ‘불온’하게 만드는 RT와 멘션의 소재로 가득하다. ‘…하지 않으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같이 순종과 굴종을 강요하는 폭언적 언사가 게임 속 세상일로 국한되면 한숨을 쉬겠지만, 상당수의 이들에겐 게임 밖 현실로 ‘연상’과 ‘동일화’가 되니 유희는 장탄식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설득과 공감, 대화가 사라진 채 굴착기의 행진만이 가득한 현실, 유혈사태는 이미 벌어지지 않았던가.

    유희는 이어진다. 한나라당 패러디 트위터 계정 한나라r당(@hannarardang)의 “복지예산이요?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는데요? 국민님, 맞을래요?”가 보여준 빛나는 웃음을 한동안 잊기 힘들 것이다. 그는 10월 27일부로 기약없는 휴면을 선언하였지만, 또 누군가는 나타나서 광채를 발하리라 믿는다. 당장에 트위터 타임라인엔 한 이웃이 이번호 한겨레21의 커버를 보여주며 누군가 “순순히 코엑스를 내놓는다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짤방을 만들어줬음 좋겠다고 요청하였다. 이젠 누군가 그 요청을 수락한 멘션을 타임라인에 수놓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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