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trex 2011. 4. 26. 09:31


20회라는 턱에서 넘어갈랑말랑하는 [노래 한 곡과 A4지 한 장]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기획.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입니다. 이 시리즈는 한 사람의 청소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음악 편력기를 통해, 취향이 한 인간의 성장과 사고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 아닌 그냥 글을 써서 흔적을 남기는 성질머리의 한 예시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연재물을 통하여 이문세, 뉴키즈온더블럭, 건즈앤로지스, 신해철, 마를린 맨슨, 툴 등의 다양한 뮤지션들을 알차게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적기엔 너무나도 죄송할 뿐입니다. 아무튼 시작합니다.


[지난회 줄거리] 사촌누나네 집에서 이문세 4집을 훔친 소년은 이 앨범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수학여행 버스에서 틀었지만 그만 내릴 때 놔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2011/04/22 - [음악듣고문장나옴] -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1화


- 급하게 버스 주차장으로 갔으나 이미 늦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트롯트 테이프와 더불어 이문세 4집을 애청해줬을까. 모를 일이다. 허락없이 친척네에서 가져온 대가치고는 혹독했던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벌이라면 벌을 받았다. 정작 겨울방학이 되어 이 사실에 대해 이실직고 했는데 크게 혼나지도 않았다. 네가 그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정도로 인식해준 모양이었다. 오죽하면 이듬해 나온 이문세 5집에 대한 탐욕(!)을 인정해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다. 중학생 1학년의 음악 욕심을 인정해준 누나는 흔쾌히 5집도 나에게 넘겨주었다. '시를 위한 시'라는 대표곡이 첫곡으로 자리했으나, 사실 '안개꽃 추억으로'의 위력엔 닿지 못했다. 그게 내겐 5집 최고의 트랙이었다.
 

MBC AM(!)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자는 기억하시다시피 이문세였다. 그런데 대구 경북은 누군지 아시는가? 대구 MBC의 젊은 아나운서가 했더랬다. 대구 MBC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에 서울서 이문세가 내려와 게스트로 노래 부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 부른 '안개꽃 추억으로'를 녹음용 카세트 테이프에 담았다. 몇번이고 늘어지게 들었다. 스튜디오와 라이브는 아무튼 다른거니까.
 

그렇다. 투명한 녹음용 카세트 테이프를 일일이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닌지라 집에서 뒹구는 테이프 중 안전한(즉, 부모님께 발각되어도 비교적 탈이 없을) 목록을 골라 스카치테이프로 덱을 봉하거나 휴지뭉치로 끼웠다. 그리고 붉은 동그라미의 녹음 버튼을 누른다. 곡이 담긴다. 그렇게 담긴 노래들이 조용필의 '모나리자'나 정수라의 '환희'였다. 팝송도 몇곡 있었겠고, 다른 가요들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그곡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가신 조용필의 위대함이나 이런걸 가리는 혜안 따윈 없었다. 그 시원함과 갈구가 좋았을 것이다.

이미지는 : www.maniadb.com 출처-사이즈 편집입니다.


아무튼 녹음은 의외로 쉬운 노동이 아니었다. DJ의 멘트가 곡의 초반과 후반을 흐리게 하거나, 광고가 노래를 절단하여 씹는 경우도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반가운 노래들이 나오면 수집하듯 담았다. 채널별 수신 상태에 따라 곡의 녹음 상태도 나름 천차만별이었건만.
 

부모님은 중학생이 되면 당연히 학생으로서 공부, 특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할 줄 아셨다. 그래서 아들이 필요하다고해서 그런줄만 아시고 삼성 '마이마이 카세트'를 사주셨다. 내게 있어 최초의 휴대용 전자기기였던 셈이다. 그 빨간 곡선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이 녀석의 몸통 안엔 영어학습 테이프 보다 이문세 5집과 친구가 빌려준 테이프 아니면, 녹음 테이프들이 뱅그르르 돌아갔다. 그리고 간혹 테이프 속 검은 내장을 우걱우걱 씹어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큰 재앙을 맞이한 듯 나는 얼굴이 하얘지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턴가 맘 먹게 되었다. 이제 돈을 주고 앨범을 사야겠구나 하는!


내 기억이 맞다면 3천 3백원이었다. 그리고 아주 엉뚱하게도 레코드점도 아니고 아파트 단지내 상가의 비디오대여점이었다. 거기서 산 앨범(카세트 테이프)이 바비 브라운(Bobby Brown)의 [Don't Be Cruel]이었다. 쪼개서 모은 용돈으로 산 목록치고는 굉장히 엉뚱했지만, 나름 또 굉장히 신중했다. 한동안 들을 앨범인데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한 곡도 뺄 곡이 없는 앨범'이라는 고집스러운 개념에 맞아야 할 목록이기에 비디오대여점 한켠의 음반 코너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고민했다. 정작 무엇이 날 이렇게 당기게 하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그때도 지금에도 후회는 없었다.(훗날 휘트니 휴스톤 관련해서 인성이 바닥인 사람이라는걸 뒤늦게야 알았다만.) 뉴에디션이라는 이름도 몰랐고, 라디오에서 한두번 들은 이름을 뭘 믿고 샀는지는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이 앨범 하나로 부모님이 없던 시간대의 집 거실은 상상력의 댄스 플로어가 되었다. 당연히 당시엔 뉴잭스윙이 뭔지도 몰랐고, 해설지에 적힌 마이클 잭슨-프린스를 잇는 신성이라는 투의 해설도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좋았던 사춘기의 개막이었다. [110423]
 

[3에서 뵙겠습니다]

- 음악취향Y 게재 : http://cafe.naver.com/musicy/13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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