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서로 미워하는 한중일 청년들, 왜? 본문
+ 한겨레 웹진 HOOK에 게재 : http://hook.hani.co.kr/archives/34811
혐한의 시대이자 혐중의 시대이자 혐일의 시대이다. K-Pop이라고 불리는 (근심스러운 거품)기류에 대해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 일본 우익단체의 목소리가 있고, 넷 공간엔 교류 대신 소통불능의 언쟁이 오간다. 중국은 불법복제 시장과 지적재산권을 도용한 전자기기 덕에 단골 비웃음거리가 되고, 한중 네티즌들은 일본을 향해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매번 촉구한다. 일본은 반대로 양국의 집요함(?)에 허를 내두르며 진저리를 친다. 이렇듯 넷 공간엔 또다른 형태로 국가간의 첨예한 대립각이 선명히 날서있다. 메뚜기떼처럼 우르르 몰려가 상대의 (넷)진영을 아수라장으로 놓는 폭력적 유희도 연례행사처럼 존재한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생각할때마다 문득 다시금 펼쳐드는 책이 있다. 보궐 선거 정국에 묘한 심난함을 안고 펼쳐 보았다.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다카하라 모토야키 지음 / 정호석 옮김). 참으로 매혹적인 제목이다. 내가 떠올린 의문을 단숨에 풀어줄 답변이라도 품은 듯한 제목이다. 원서의 제목은 그렇지 않으며, 사실상 부제인 ‘불안형 내셔널리즘의 시대, 한중일 젊은이들의 갈등 읽기’라는 문장이 이 책에 대한 더 그럴싸한 해설이다. 1976년생 젊은 저자는 한중일 이 3국의 동시성(同時性)에 주목하며, 성장지향적인 경제정책으로 아시아의 중심 국가가 된 각국의 이면 특히, 젊은이들의 사정에 초점을 맞춘다. 각국의 개별적인 환경에 처한 젊은이들의 현실적 곤란함과 첨예한 대립각이 서있는 넷 공간의 내셔널리즘간의 연관에 하나의 답변을 마련코자 한 것이다.
저자 다카하라 모토야키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의 경제성장은 3단계에 의해 이뤄졌다. 책에선 단카이 세대(베이비붐 세세대)에 의해 급소독의 경제성장을 일궈낸 ‘총중간층화’ / 종신고용과 ‘회사주의’의 일단을 확립한 ‘탈공업화’ / 종신고용의 신화가 붕괴된 작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사회유동화’의 3단계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회사주의’의 완강한 규칙와 위치를 간신히 견지하려는 단카이 세대 이후의 젊은이들은 회사가 인생을 책임진다는 세대론에 소외됨은 물론, 사회 말단에 몰리게 된다. 이들이 흔히 ‘프리터(freeter)족’이나 ‘니트(NEET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으로 불리며 일본 자국내의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저자는 이 지점에 주목한다. 자국내의 (해결되지 않은)세대 갈등 대신 이 자리에 내셔널리즘,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불안형 내셔널리즘’이 발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내셔널리즘은 역사 의식의 견지가 아닌 네편내편을 가르는 게임의 법칙에 의한 ‘유희’로서의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이다.
자국 사정을 두 챕터에 나눠 설명하던 저자는 한국과 중국의 사정을 한 챕터씩 할애하며 설명한다. 물론 자국의 사정에 비해 덜 밝은지라 연구의 한계점은 명확해 보이지만, 비교적 혜안을 가지고 국가별로 그들의 근현대사를 분석한다. 저자에 의하면 한국의 내셔널리즘은 3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반일 감정의 뿌리가 일본을 향하고 있다기 보다는, 개발독재 과정의 기득권(또는 친일파의 후예)를 향한 계층 / 가벼운 유희로서의 반일 ‘유희’를 즐기는 계층 /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반공주의 또는 국가주의에 경도된 계층으로 분류된다는 분석이다. 저자 역시 3번째 계층에 대한 분석의 난감을 토로하고 있으며, 그 고민은 비단 저자가 아닌 우리 자신들의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중국에 대한 분석 역시 고도성장 과정에서 배금주의의 법칙에 쉽게 손을 들면서도, 한켠엔 수없이 소외될 수 밖에 없었던 젊은층의 고민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저자의 근심은 이렇다. 전지구적인 움직임이었던 신자유주의의 바람과 그로 인해 야기된 개인의 불안과 해결의 소통로가 되지 못한 기성 정치 구조. 그로 인해 상대국을 향한 배타적 언사만 늘여놓을 수 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문제… 이 합당한 고민에도 불구하고, 책은 아쉬운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내셔널리즘간은 단순히 유희로 인해 추동되고 그로 인한 부작용만 있는 것일까. 그 안에는 분명히 내셔널리즘의 한계를 넘은 상대국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묻는 진지한 목소리와 성찰도 의당 있지 않는걸까. 이 책은 그것에 답하지 않는다. 또한 개별 국가 내의 소통과 내부적인 시스템 개선만이 젊은층이 안고 있는 불안형 내셔널리즘에 대한 개선책일까. 이 책이 펼쳐놓은 스케일에 비하면, 이건 다소 소극적인 답변 같아보이기도 하다. 요컨대 ‘첫 시도’이자 ‘첫 물음’이라는 점에서 이 저서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후 보다 명료하고 집요한 접근들이 ‘넷 전쟁’을 서슴치 않는 3국 젊은이들의 갈등을 보다 가까이 해부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본 저자의 책을 덮으면 다시금 떠올리는 것은 이 땅의 젊은이라고 불리는 우리들(무리한 합류인가?)의 문제이다. 대학이라는 질서에 합류하기 위해 유소년기부터 희생을 감내하고, 기다리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학비와 대출상환의 짐. 졸업 후에 기다리는 취업 불황의 기나긴 통로와 잔혹한 시행착오들. 그런 그들에게 정치적 무책임이라고 내몰아세우는 세간의 잔인한 입담들. 20대 개새끼론이라는 폭언(투표하지 않고 정치에 무관심한 너희들은 욕을 먹어도 싸다!라는 언사들), 그리고 완강한 세상사에 합류하고픈 욕구가 만들어낸 우경화의 함정. 유희 대신 주어지는 것은 강제된 유희인 폭주와 회사 조직의 업무 강도 등. 무엇보다 내셔널리즘 이전에 같은 세대간에 야기되는 계급 갈등과 넷의 폭력들은 지금 우리 시대의 근심이다. 외부 이전에 내부를 다시 근심할 수 밖에 없는 시기다. 결국엔 불안형 내셔널리즘의 발현 자체가 이 사회의 건강함에 대한 이상조짐인 탓이리라. 보궐 선거 정국 전후에도 이 우울의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탓이 크다. [1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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