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세월호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 - 어떤 논쟁에 대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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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 - 어떤 논쟁에 대하여.

trex 2014. 4. 28. 23:37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끝나지 않는 비극을 복기해야 한다. 이 비극을 새삼 말하는 것에 때로는 죄스러움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그럼에도 나는 비극의 원천을 감히 제명에 붙었다. 이건 온당한 일일까. 곳곳에 슬픈 소식이 덧붙여지고 시스템이 흉하게 곪은 속을 보여주고 있고, 어떤 일들은 지속해서 은닉되고 있다며 사람들은 탄식한다. 신해철과 넥스트가 만든 들을만한 싱글 몇 곡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실패작, 음반 『개한민국』과 수록곡 「현세지옥」은 옳았다. 적어도 제목에선.



4월 25일 트위터 타임라인이 이 비극적 시국과 연관하여 잠시 들썩였다. 웹진 보다와 웹 저널 등에서 활동해온 대중음악의견가 서정민갑씨가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것은 (중략) 음악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 정치적이라며 피하고, 한정된 순수와 낭만만을 담으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트위터에 일차적으로 피력하였고, 이에 음악인 이이언씨의 즉각적인 반론이 멘션으로 이어졌다. 이이언의 경우 음악인의 입장에서 '예술에 어떤 당위를 짊어지게 하는 순간 예술은 퇴보하고 믿'는다는 의견과 더불어, '선택을 하는 것은 온전히 예술가의 몫'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지는 웹진 웨이브와 아이돌로지의 필진인 미묘씨의 추가적인 의견 역시 이이언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세월호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적 이슈에 뜻하지 않게 시작된, 대중음악의견가와 현업 음악인의 논박은 '현실 참여와 예술 간의 관계'라는 예술사의 오래된 테제를 새삼 가져옴으로써 140자 매체 이상의 무게감을 지니게 되었다. 논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졸렬한 필부나 하는 일이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대체로) 이이언의 입장에 좀 더 지지의 무게가 실린 채로 일단락된 듯하다. (당연히 서정민갑의 의견 제기가 애초에 무의미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드물게 나온 이슈인 만큼 단순히 반나절 간의 논쟁으로 묻어두기엔 생각할 대목들이 제법 있는 이야기들이라 좀 더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일단 서정민갑의 의견은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 [세월호 침몰 사고, 음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링크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139 )의 논지를 140자에 함축한 것이라 하겠다. 대중음악의견가이자 글 쓰는 이로서 그의 주된 테마 중 하나는 꽃다지, 손병휘, 연영석 등 민중가요 진영의 가치와 신자본주의 아래 축소된 음악운동에 대한 전망이라 하겠다. 그는 평소에 대중 음악씬에서 촉발되는 여러 현상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곤 했지만, 다른 필자들이 소홀히 지나쳐온 민중가요 진영의 과거와 현재, 희망이 흐릿한 미래들에 주력하여 소개해 왔다. 확실히 그 글들이 지닌 가치는 헐뜯을 수 없으며, K-Pop을 향한 속도감을 늦추지 않는 여의도 음악들과 몇몇 매너리즘에 빠진 음악씬 외의 것에 우리의 시각을 환기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인재에 의한 국가적) 재난 이후 음악과 음악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해야 한다는 흐름의 맥락에 그의 글과 트윗은 나온 듯하다. 그리고 즉각적인 반론을 감수해야 했다. 일면 이해될 수 있는 글이었으나 반론에 부딪힌 이유는 무엇일까? 서정민갑의 논지는 그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 아도르노가 말한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선언 안에 팍팍하게 막힌 듯하다. 창작자에게 서정이라는 문체를 택하든 참여의 문체를 택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일진데, 이것을 당위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라 말하니 당연히 현업 음악인(들)의 반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정성을 택하는 것이라고 현실을 방관하는 것일 리도 없고, 시스템의 균열로 야기된 재난의 책임을 음악 창작 계층에게도 일부 돌리는 듯한 오해의 대목도 제법 위험했다.



일견 수긍이 가는 대목은 있다. 이 재난과 비극들은 '현세지옥'의 가장 적절한 비유로 보이고, 지금 내가 숨을 쉬는 사회가 총체적으로 붕괴하고 있다는 첫 번째 근거로 보인다. 하지만 서정민갑의 글을 전적으로 지지하기란 쉽지 않다. 참여와 분노가 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이라는 전제에 두 손 들고 동의할 수는 없고, 서정의 문체가 현실 외면이라거나 이 시기에 잠시 멈춰야 정서의 문제라고 여기진 않는다. 무엇보다 그것이 서정이든 유희든 참여든 분노든 예술가들은 지속해서 외부와 개인 간의 화살표를 주고받으며 결과물을 산출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각자의 역할을 부여하고.... 아니 부여한다는 의식 자체가 필요없이, 자율적으로 생산하는 예술의 결과물이 시대를 말하고 증명한다고 믿고 있다. 어쩌면 이건 지나친 낭만론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양성과 자율성은 애초부터 (대중) 예술의 미덕이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나는 [이야기해주세요] 1, 2집으로 대표되는 한국 여성 음악인들의 작업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음반에서 음악인 소히는 보사노바 안에서 흥겹게 '여성성과 육체의 위기'에 '고발의 다짐과 용기'라는 이야기 구조를 수놓는다. 기쁘고 슬프고 무섭고 주먹 불끈 쥐게 만드는 구조다. 일본군 강제위안부 소녀들의 원혼들이 영롱하게 '날 잊지 말아요'라며 이효리의 목소리를 빌어 노래하고, 이런 참혹한 과거들을 언급하는 행위를 지켜 달라는 한희정의 목소리가 호소력 있게 들린다. 현실과 서정이 엉킨 감동이다. 자율성과 참여가 만나는 대목이다. 고발하고 분노해야 한다는 당위로도 이런 결과물이 가능할지?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물론 재난을 도외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핏대 선 안구로 피곤하게 뉴스란이 뜬 모니터를 보는 와중에 대중 음악인들은 오늘도 내일도 음악을 만들 것이다. 고발과 분노의 음악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당위와 의무보단 그들이 들려줄 새로운 음악에 대해 신뢰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무엇보다 고속성장 이후 천민자본주의가 신속히 자리 잡은 한국 풍토에서 펑크(Punk) 음악이 꽃이 피기도 전에 이리도 외면받는 현실이 더욱 신기해 보인다. 저항하고 맞설 대상은 즐비하나 그것에 대해 저항하는 목소리를 지닌 장르 음악들이 좀체 동의를 얻지 못하는 이  현실은 비단 음악인들만의 책임일까? 이런 음악씬이 자생할 수 있는 풍토인지 음악인들이 목청 높이 저항을 부르짖을 수 있는 환경인지, 시스템에 대해 회의하고 음악을 변화를 도모하는 고민을 하는 것 역시 음악 평단의 몫이기도 할 것이다. 음악을 만드는 이들이나 듣는 대중들이나 결코 참여와 순수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설명되지 않는 대상임을 전제하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그런데 같은 날 저녁, 고양문화재단의 일방적인 '뷰티플 민트 라이프' 음악 페스티벌 취소 공지로 음악씬이 더 들썩거리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음악인들이 공교롭게 서정민갑에 대해 일차적인 '서운함'을, 고양시의 입장에 대해 이차적인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이다. 페스티벌 대표와 음악인들이 말한 '음악이 할 수 있는 위로의 기능'조차도 봉쇄된 것이다. "세월호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세월호 이후, 오선지는 뺏기고 앰프 선은 잘렸다."라는 답변으로 되돌아왔다. 난데없는 수난기가 시작되었다.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줄 음유시인은 애초에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군집하여 서로 위로하고 울분할 카니발을 즐길 민중의 자유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다. 



앞서 언급했듯 서정민갑이 제기한 문제가 애초부터 무의미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교롭게 다른 성격의 일들이 25일 연달아 벌어져 우리들의 고민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졌다.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의 시점이 온 것이다. 한국 대중예술인들에게 허락된 자율성은 어느 만큼의 폭일까. 애초부터 그 폭을 정하는 것이 주체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 시스템에 쥐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다. 이런 형국이라면 자연스럽게 발산된 분노의 자양분을 먹은 음악조차도 쉬이 용납지 않을 모습이다. 기본적인 생존권은커녕 창작과 활동의 방향까지도 운신의 너비가 제약된 한국 음악씬의 비극이다. 진정 현직 종사자들과 음악 청자, 그리고 평단들까지 한숨 나오게 하는 풍경 아닌가. [140428]





* 트윗으로 인한 논박의 결과를 두고, 어떤 밴드는 자신들은 연주팀이라 가사로 현실을 표현하기 쉽지 않다고 하였다. 물론 대중음악의견가가 던진 말들에 대한 '서운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나는 이 대목에서 더 히치하이커와 잠비나이 등이 떠올랐다. 지향점은 다르지만 소음에 가까운 극단적인 사운드가 치밀고 들어오는 이들의 음악은 가사보다는 연주에 주력하는데, 그럼에도 불온하고 불길한 정서로 절망적인 현실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방법은 많을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것 또한 창작자에겐 선택의 영역이 아닐까. 



+ 웹진 다:시 게재 : http://daasi.net/special/2014/04/2721

+ 음악취향Y 게재 : http://cafe.naver.com/musicy/18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