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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고감상정리

[버닝]

trex 2019. 7. 27. 16:26

해외 영화계에서의 반응과 좋은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갈증과 별개로 [버닝]이 개봉되던 당시에 흔쾌히 상영관을 찾아갈 결심을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호의를 가지기 힘든 배우 유아인이 주연이라는 사실과 [오아시스]와 [밀양]이 거둔 성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이창동 감독의 기묘하게 불편한 태도는 이미 내게 피곤하게 누적된 상태였고 - 그걸 생각하면 [시]는 힘겹게 예외상황을 허락한 진정한 걸작 인지도 - 이렇게 수년 뒤에 넷플릭스 덕에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게 참 난공불락의 상태였다. 홍상수의 작품 안에서 어떤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문성근 배우, [자백] 포스터에서 연출을 담당한 자신의 모습을 [스포트라이트]풍으로 새겨 넣은 최승호(현 MBC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등의 출연, 무엇보다 여기에 한 신인 여배우는 나신으로 춤을 추며 이 종합예술 안의 한 자리에 배치되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원안으로 한다는 시나리오는 오정미 작가의 작업을 바탕으로 감독의 손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예술가 청년’, 소위 문창의 성장담으로 뚜렷한 골격을 지니며 그려진다. 이것은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세상에 나오는 시기의 전후 관계를 상관하지 않고 말한다면)[기생충]적인 이야기다. 문학청년 종수는 지속적인 열등감의 원천인 벤에게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벤이 그의 입으로 말한 (비유인지 직접적인 언술인지 알 수 없는) 방화 행위에의 매혹 및 위험함과 종수의 삶에 애초부터 결여되어 있었던 ‘베이스’의 리듬감(및 부유함이라는 가치)에 대한 복잡한 형태의 미스터리함 때문이다. 미스터리, 그렇다 극 자체가 어디까지가 등장인물들의 언술 자체가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비유한 창작인지 실제로 일어나거나 일어났던 일로 굳이 구분하지 않거니와, 감독이 현시대 청년 세대를 근심하며 보는 시각 자체가 미스터리를 마주한 난감함의 입장 그것이다. 종수에겐 파주 인근에 들려오는 북측의 대남 방송이 현실이지만, 부유하게 자라나 포르쉐를 몰고 다니는 벤에겐 그것은 그냥 ‘그렇군요’라고 말하게 되는 아무렇지도 않은 탈정치적인 무관심 거리다. 

애초부터 종수에게 첫 집착 대상은 벤이 아닌 해미였다. 팬터마임과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고양이와의 공존 방법에 대해 알려준 해미가 정작 부재할 시점부터 종수에게 해미란 존재는 집착의 아련함을 차지하게 된다. 일본 대중문화의 지분을 함야받은 듯한, 출구 없는 남자 젊은이의 자폐적 유약함을 상징하는 듯한 수음이 펼쳐지고(여기에 창밖에 우뚝 솟은 N타워의 모습은 압권) 이런 집착의 대가는 결과적으로 해미의 해답없는 실종으로 이어진다. 해미는 정말 ‘그레이트 헝거’의 경지가 되었을지 고작 방화 행위의 비유로 쓰인 ‘버닝’하는 ‘비닐하우스’가 되었을지 그저 가족에게 진 카드빚을 뽑을 능력이 없어 사라진 것인지 우리 모두는 알 도리가 없다. 앞서 말한 이 작품에서 가장 공을 들인 아름다운 장면 안에서 나신의 춤을 남기고 퇴장당할 뿐이다. 영화평론가의 김혜리의 표현을 빌자면, ‘해미의 이야기가 더 궁금한’ 상황인데, 고작 종수에게 새로운 집착의 대상이 되는 벤을 소개해주고, ‘배달’(또는 역할 바톤터치)을 해준 역할을 수행한 채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의 타자기가 생긴 청년의 문학(행위) 선언처럼 종수에게도 해미 덕분에 방이 생기고 드디어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문학청년 성장담의 조건 수립을 위해. 아 그리고 여전히 N타워가 바라보는 그 작은 방 안에서 여전히 수음을. 또.

감독이 클럽 문화 묘사 등을 통해 현세대 청년들을 보는 것을 오해하는 것 같다는 지적은 굉장히 사소한 시비다. ‘분노’ 조절장애라는 부친이 집에 남기고 간 열쇠를 이용해 ‘칼’을 획득한 종수가 그간에 엉킨 정신상태로 품고 있던 의혹과 ‘분노’를 매개 삼아 벤을 난자하는 최종 결말에서 눈밭을 나신으로 걷는 ‘예술적인 풍경’을 전시하는 게 내겐 그게 더 문제 같아 보였다. 이건 실로 감독의 전력을 닮아있는 그다운 풍경이자 귀결 아닌가, 철저하게 통제된 현장과 자연광의 만남으로 만들어진 정성스러운 홍경표의 촬영과 이 나라의 정상급 영화음악 작곡가 모그가 만든 결과물의 배합은 의당 앞으로도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고, 이창동의 서사와 시간은 논쟁적으로 읽힐 가치가 큰 대목이자 소재다. 그런데 내겐 이것을 높이 성찬 할 의지보단 문제였어라고 곱씹게 하는 복잡한 심사의 기억으로 더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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