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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마이 카]

trex 2022. 3. 16. 12:09

일단 자동차라는 도구를 생각해본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요즘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 액정으로 시원하게 오퍼레이팅 해주는 테슬라 같은 전기 자도창 영상을 유튜버로 종종 본다. 막힌 도로 위를 쾌청하게 질주하는 감각은 1차적으로 사람들이 자동차를 애호하는 근본적인 이유겠지(넷플릭스로 [F1] 시리즈를 챙겨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한편 자동차는 간혹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같은 난폭한 시네아스트에 의해 [크래시] 등의 작품에서 교미하고, 임신에 이르는 기이한 자본주의적 욕망의 매개체를 하기도 한다.(오 노...)

[드라이브 마이 카]는 도로 위의 질주와 운송 공간 앞뒤를 통한 등장인물 간의 교류를 보여준다. 이 3시간 러닝 타임에 달하는 일본산 아트무비니 그런 것은 관람 수분만에 바로 짐작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알려지다시피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 속 수록 작품 중 하나에서 제목을 따왔고, 영화는 이 기본 얼개를 포함, 같은 책 안의 [셰어라자드] 등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등장인물 가호쿠가 섹스와 후희를 통해 부인 오토에게 들은 '그녀식의 천일야화'를 다음날 문자로 전해주고, 그것은 오토의 이야기로 서술된다는 것은 우리는 이때쯤 이것이 이야기라는 예술의 기본양식에 대한 메타적인 언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호쿠는 연극 극단의 연출자이고, 오토는 방송 작가이다. 둘 다 이야기 문학을 통한 예술 종사자다) 서로의 나신을 탐하던, 아름다운 부부... 간혹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한 두 사람에게 안락만이 자리하면 좋겠으나 한쪽의 불륜을 목격한 이후 다른 한쪽이 선택한 방관은 균열을 야기한다.

한 한국 현대문학의 아이콘 중 한 명인 이상이 [날개]에서 서술한 남녀의 균열을 '절름발이'로 정의한 대목을 아직도 사랑한다. 어긋난 발걸음은 오토의 지주막하출혈로 인한 사망으로 조용한 파국을 보여주는 것으로 아야길 다른 것으로 인도한다. 시청 중인 뇌졸중 경험자였던 나는 나대로 지주막하 출혈에 대해 구글링을 해보며 가호쿠의 불운을 주시해본다. 부인에게 미처 확인하지 못한 마음과 대화의 매듭, 형언하기 힘든 죄책감이 줄 마음의 멍은 한마디로 상처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

덕분에 작품을 보면 아 그럼 저 등장인물이 일본 아트무비를 통해 치유받고 회복받는 휴머니즘적인 치유를 하겠구나 라는 짐작을 할지도? 맥락상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은 [드라이브 바이 카]를 보는 이들에게 친절하고 낯익은 방법이겠으나, 안톤 체홉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만드는 작품 속 서사를 껴안기도 하는 이 이야기에는 보다 간곡하게 들려주고픈 감독의 목소리가 있겠구나 하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일본어-한국어-중국어-영어-여기에 수어까지 다양하게 갈라지는 배우들의 언어는 잠시 내게 [이터널스] 같이 사려깊은 인종과 정체성을 안배한 프로젝트와 가깝게 보일 정도였다. 한국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극 중 인물들과 소통하고, 작품 마지막 한 인물이 선택하는 국적과 생활의 지정학적 공간은 한국이기도 한데, 어떻게 보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보낸 우정의 작은 징표로 보일 지경이었다.

아무튼 [드라이브 마이 카]가 질주하는 도로의 끝길엔 무엇이? 축적되고 쌓인 대화를 통할 가호쿠와 운전수 미사키의 교감(과 들으며 흡수되는 대화의 정보 값들)의 과정엔 같이 피는 담배도 나름 중요한 매개이거니와 미사키가 말하는 그의 상처와 사정도 포함되어 있다. 가호쿠가 오토를 잃은 상실의 정도만큼, 한편엔 미사키는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를 통한 폭력의 상처가 그만의 큼직한 멍이었던 것이다.

공교롭게 가호쿠와 오토 사이의 딸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면, 미사키와 동년배였을 거라는 설정은 다소 공교로운 일치로 보이기도 했는데, 지나치게 부담스럽진 않았고, 기본적으로 자동차라는 협소한 공간이 경우에 따라선 언어와 발화의 형식으로 가호쿠 부부를 였었던 공간이기도 하고, 미사키에겐 모녀 사이가 원만했던 순간들을 대변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제목 자체를 새삼 되짚게 한다. 

짧지 않은 러닝 타임이 흐르면 우리는 명료하게 깨닫는다. 등장인물의 사정이 안톤 체홉의 대사와 보편적으로 겹친다는 점을. 그 안엔 배우자의 부정이나 질투, 총이나 폭력을 이용한 가혹한 파국, 비극과 삶에 대한 긍정의 태도가 스며있다. 그 이야길 보기 위해 관객 역시 하나의 연극이 완료되는 과정까지 차분히 관전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질주하는  사브 차량은 차분히 질주하며, 카메라는 서서히 만발치서 서로의 이어지는 삶을 담는다.

상처 입어 두들겨 맞은 고향으로서의 모국,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판데믹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스크로 봉한 지금의 거처에서라도 일상은 이어진다. 진작에 서로에게 솔직해야 했음을 뒤늦게 인정하고, 때론 자신이 상처 입는 게 제일 두려웠다고 솔직하게 토로하는 방식으로서라도. 물론 그게 가장 어려운 약한 사람들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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