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한국 영화 지리상에서의 [한공주] 본문

영화보고감상정리

한국 영화 지리상에서의 [한공주]

trex 2014. 5. 7. 19:04

밀양에서


이창동의 [밀양] 마지막 장면. 누추한 인간의 바닥 위에 조성된 작은 화단과 그 위를 내리쬐는 햇살을 보여준다. 밀양은 그 단어 자체로 은밀한 볕을 뜻하는데, 그 언어의 힘만으로 한 여인의 망가진 육신을 말없이 보듬어 안는다. 신성함의 경지이면서도 거기까지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선, 자리매김으로서의 권능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은 탄식을 낳았는데 나는 21세기 들어서 이창동에 의해 ‘문예영화’가 재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오아시스]로 인한 ‘개인적인 마음 상함’은 이로써 풀어지게 되었고, 그의 행보는 내 감정과 처지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시]로 이어져 하나의 경지를 낳았다.


지방도시 밀양은 은밀한 볕이 내리쬐는 죄 사함의 지리적 배경이 되었지만, 정말 훗날 밀양은 여중생 사건에 인해 인간의 마귀화와 시스템의 흉물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위치로 공교롭게 자리 잡게 되었다. ([링크] '여중생 집단성폭행', 비공개 약속 깨고 피해자에게 폭언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0017831)


[시]의 주된 무대는 정작 밀양이 아니었지만 영화는 마치 전작 [밀양]의 무대에서 이어지듯 첫 장면을 연다. 물가에서 놀던 아이들 저편에서 소리 없이 여중생 교복 하복을 입은 사체가 떠내려온다. 이미 사체인 처지이므로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사연을 복기할 수 없다. 이 난처함은 [마더](봉준호 감독)의 옥상 위에 널린 ‘교복’ 사체 여학생과 유사한 처지이다. 자신의 이름과 사연을 호명할 수 없는 여학생들의 사체를 보여준 뒤 한국 영화의 일부 일군은 예술의 위치를 고민하고, 인간 윤리에 대한 고뇌를 토로하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부모들은 윤리적 고민을 애써 밟고, 아이의 복수를 사법의 영역을 넘어 직접 감행하기 시작했다. (김용한 감독의 [돈 크라이 마미], 이정호 감독의 [방황하는 칼날] 등) 아이들은 반성하지 않으며 죄의 영상을 담았으며, 그럼으로써 부모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엔 자경 행위에 대한 흥분된 죄책감을 안고, 광경을 두 눈 뜨고 봐야 하는 관객들이 존재한다. [한공주]는 여기 다른 지점에서 걸어온다. 주인공 한공주는 자신을 호명할 줄 알고,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 그러나 어머니는 말을 자르며, 아버지와 ‘남자’ 선생님은 자꾸만 핵심을 의도적으로 비켜난 이야기들을 한다. - ‘수영’이라는 행위를 최소한의 의지를 갖추며 서툴게나마 배워간다.

 

* [한공주]의 연출을 맡은 이수진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반드시 ‘밀양 사건’을 두고 만든 것은 아니라고 발언했다.

* 한공주라는 이름은 공교롭게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에서 문소리가 맡은 배역과 동명이인이다.



인천에서


[한공주]의 주된 배경은 인천이다. 그렇다. [천하장사 마돈나](이해영, 이해준 감독)와 [파수꾼](윤성현 감독)에서 교복 입은 남고생 아이들이 맥아더 동상 아래와 차이나타운을 쏘다니고, [고양이를 부탁해] 의 여학생들이 불투명한 스무 살 앞날을 지레짐작도 못 하던 그곳 말이다. 이들 작품 중 [파수꾼]과 [한공주]는 다소 닮아있는데, 동년배의 죽음에 대해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처지의 아이(들) 이 놓여 있고 주인공(들)의 사연을 밟아가는 간헐적인 과거씬들의 삽입 연출들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 반면 [파수꾼]의 연출은 사연에 대한 여백을 의도적으로 만들지만, [한공주]의 연출엔 외면하고 싶은 사연의 여백조차 채우는 난폭함이 서려 있다. 폭력을 행사할 때 아이들은 고릴라의 탈을 쓴 40여 마리 군집의 짐승에 가까운 상태이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점은 [시]의 ‘부모들’처럼 이 영화의 어른들 역시 여전히 ‘합의’라는 편의적인 표현의 폭력을 지속해서 가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하면 죽음의 사연을 ‘듣고자 하는’ [파수꾼]의 조성하가 보여주는 절박함은 투박하게나마 차라리 신사적인 면모가 있다.) 즉 40여 마리의 짐승을 낳은 것은 물론, 짐승의 상태에 대한 입 닫음을 부탁하는 80여 마리의 어미 짐승들이 엄연히 이 세상엔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한공주가 애초에 수영을 배우려 한 목적, 단 25미터 완주만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해보고자 했던 원동력은 이렇게 봉쇄된다. 오만 진심을 내보이며 강아지 같은 충심으로 다가온 새 친구 은희마저 대사로 표현한다. ‘거긴 나가는 길 없어.’


* [링크] 성폭행도 억울한데…밀양 여학생 냉대 끝 가출 : http://www.segye.com/content/html/2007/06/17/20070617000319.html



한강에서 


서울은 ‘배신자’이자 유일하게 한공주에게 환한 미소를 허락받은 어머니가 있는 곳이다.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어머니가 있는 곳은 동물병원이 밀집한 충무로 일대라고 한다.) 앞에서 적은 대로 어머니는 이런 한공주의 말을 애초부터 자르고, 진짜 ‘배신자’가 된다. 아버지에게 건 마지막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멜로디의 앰프 소리, ‘남자’ 선생님의 찜질방에 간 사실에 대한 답변, ‘잘했다.’ 등이 주는 아득한 절망감은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세상 속에서 더 나빠진 한공주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공주가 택한 종착지는, 앞서 잠시 거론한 봉준호 감독이 옥상에 여학생 사체를 [마더] 속에 널기 전 [괴물]을 낳은 바 있는 ‘한강’이다. 괴물은 ‘관대함’을 요구하는 미국에 의해 한국이 피치 못하게 낳은 생명체이며, 한강 변에서 어느덧 튀어나와 종 내엔 ‘교복’ 입은 현서를 냉큼 삼켰으나 위액에 미처 녹이진 못한 상태로 대지 위에 불타 죽는다. 한공주는 햇살 내리쬐는 인간의 누추한 바닥 대신 이 한강에 온몸을 담갔으며, 될 수 있는 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나올 생각은 없는 듯 보인다.


이것은 하천에 내쳐진 옛 친구 화옥이 지속해서 환기하는 죄의식이 일으킨 씻김 또는 동일화 같기도 한데, 대신 한공주는 출연한 배우들이 후시 녹음한 응원 구호를 들으며 희망의 물길 질을 한다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객석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간의 감상 차이는 극명할 터이다. 작지만 성실한 영화가 예산의 문제로 의도했던 CG 효과가 연출의 입장과 다른 결과를 낳은 것일 수도 있겠다. 허나 근본적으로 그런 부차적인 문제를 떠나서 한공주를 바라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표현할 길 없는 깊은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분명한 사실이 나로 하여금 영화가 보여주려는 희망의 기운마저도 끝없는 슬픔으로 도치되어 비친다.


* 이 영화가 내게 준 몇 가지 사소한 불만과 이 영화가 가진 좋은 강점 중 하나인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선 미처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뜻하기도 하다. 이 부분은 다른 분들이 앞으로도 계속 언급해 주시리라 믿는다. [140507]






'영화보고감상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부색깔=꿀색]  (0) 2014.05.14
[한공주]  (0) 2014.05.06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  (0) 2014.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