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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

trex 2019. 3. 3. 18:26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이하 [군산])는 장률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큰 3가지의 양상, ‘거의를 노래’하는 작품이다. 과문한 나는 이를 크게 3가지 단어로 쪼개 키보드를 통해 옮기고 기록한다.

경계(지우다)

장률의 작품이 드러내는 삭막하고 비의에 젖었던 정서들은 2010년 이전 작품에서 도드라진 것들이었다. 여기엔 여성을 유린하는 남자들이 있고, 이런 서슬 퍼렇고 흉한 일들이 변방의 풍경 바깥 이들에겐 은폐되고 있었다. 작품명이기도 한 [경계]는 신나고 휘황한 남한의 영역과는 다른 연변이나 탈북이라는 바삭하고도 건조한 단어와 어울리는, 장률이 그린 세상에 어울리는 영역을 대변하는 단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우리와는 ‘상상과 구상 이외’의 곳에서 그들을 선 긋게 만드는 영토 또는 집단의 구분법. 그토록 삭막한 단어인 경계는 연변이나 두만강, 그것이 실은 남한이라 하더라도 쇠락한 지역명을 대변하는 ‘이리’(작품명이기도 하다)로 대표되었는데 이 양상이 2010년 이후 작품 [경주]로 변화한 것이 슬슬 드러나보였다.

관광특구이기도 하고, 이 글의 [군산]과 더불어 따스한 햇살을 보여주는 [경주] 안의 풍경과 싱거운 웃음들은 장률의 작품이 서서히 변화한 징표 같았다. 경주에 이어 파주, 가장 최근의 군산까지 음악인이자 배우인 백현진이 작품 속에서 연신 싱거운 웃음을 흘리게 하고 이제 사람들은 술도 차 한잔도 국수 한 사발도 잘 흡입한다. 이제 좀 사람들이 살만해 보인다! 중국의 접경 지역에서부터 두만강을 건너온 장률의 여정이 남한에 닿자 웃음과 배 불리기를 실현하였다. 그런데 그럼 이 시네아스트의 아트무비의 여정에서 기름기와 태만의 기운을 드러내지 않겠냐고?

로컬의 변화가 작가의 예민함을 바꾸진 않는다. 여전히 문제는 ‘경계’가 된다. 햇살 아래 온화한 그림들 속에서도 장률은 이 남한이 분단국가라는 독특한 지정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상당히 곤란한 현대사 속 입장, 날이 설 수밖에 없는 농담으로 현실을 애써 가리는 순간들이 일상 안에 가득 찬다. [경주]에선 남북문제를 둘러싼 진지한 질문을 하는 백현진의 궁금함을 박해일이 말도 안 되는 답변으로 일순간에 날려버리고, [군산]에선 명계남이 우리 안의 레이시즘과 당신들 안의 반공주의를 합산해 틈도 없이 신속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맑음과 비가 교차하는 군산의 날씨 아래 일본군의 만행으로 목이 참수된 사람의 기록 사진이 야외에 전시되고, 애초 감독이 기획한 목포에서의 촬영은 군산으로 변경되자 서울과 군산에선 잊을만하면 윤동주의 시구와 인물이 거론된다.

경계는 표면적으로 지워졌지만, 완강하고 힘센 힘을 발휘하며 안 지워지는 경계 본연의 속성 또한 여전하다. 웃음을 나오게 하는 사람들의 등장과 태평한 연애담 속에서도 장률의 예민함이 바뀌었다고 말할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그것은 의도적으로 지워졌고 흐려졌을 뿐이다. 박해일은 갑자기 유창하게 대만에서 배운 중화 언어를 사용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군산과 서울 신촌에는 어수룩하게 우슈 같은 몸짓을 하는 젊은이들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죽음

적지 않은 이들이 기억하겠지만, [경주]은 언뜻 소위 사람들이 ‘홍상수식 서사’를 시도하는 듯하면서 경주라는 ‘능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린 죽음 충동이 태연하게 작동하는 작품이었다. 박해일은 그가 교수로 일하던 중국에서 ‘장례’ 때문에 대구에 도착해 누군가의 행로를 쫓아 ‘능의 도시’ 경주로 발길을 옮기고, 그 과정에서 곧 ‘자살을 택하게 될’ 모녀와 잠시 조우하고 그가 최종적으로 경주의 여정 마지막에 택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는 [군산]에서도 이어진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참수당한 목이 실린 야외전시의 사진처럼 등장하는 인물 몇몇은 죽음이라는 개인사와 결부되어 있고, 농담을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행위는 단어와 문장으로 또렷하게 거론된다. 아버지 명계남의 기계적인 반공주의에 박해일은 동네 어르신에게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문소리는 전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그 사람은 자신의 가슴 안에서)”죽었어”라고 답을 한다. 윤동주의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한 시선으로 영상 자료를 시청하는 연세대 점퍼 엑스트라들이 등장하고, [군산]이라는 로컬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박해일의 입장에선 이 여정이 실상 ‘죽음 뿌리’ 찾기이고 그 ‘죽음 뿌리’의 거울상인 정진영-박소담 부녀가 (준비한 듯이 운명처럼 기다리며)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죽음 충동과 예비된 듯한 여정 안에서 초연한 것은 두 명의 여성이다. 문소리는 장률의 작품 안에서 이전의 [경주]의 신민아 등의 등장인물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능동적이고 경이로울 정도의 리듬감을 보여준다. (짐작하겠지만 이건 이 배우가 정말 훌륭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문숙은 과거와 현재의 지정학적 로컬이 어딘지 자체에 대해 답을 할 필요도 없는 권능 있는 지배력을 발휘한다. 장률이 어떤 매체의 인터뷰에서 말했듯 그냥 ‘남자들이 제일 문제일 뿐’이다.



작품에서 제일 인상적인 연출 중 하나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1부에 해당하는 군산 편과 2부에 해당할 서울 편의 사이에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라는 자막이 차분하게 등장하는 대목이다. 이 ‘경계’(!)를 기점으로 관습적인 영화 보기의 습관을 빌자면, 1부가 현재고 2부가 과거에 해당하는 부분일 텐데 실은 꼭 그렇게 봐야 할 필요도 없지 않겠냐는 ‘시네필인 척하는’ 해석도 큰 상관은 없을 테다. 아무튼 2부는 1부의 그늘진 분위기와 대놓고 ‘죽음 충동’ 흘리기와 ‘죽음 뿌리’ 사연의 연원에 대해 친절하고 여유 있게 설명을 해주는 대목이다. 연결된 연애담으로써의 [군산]에 대해 등장인물들의 속 사정을 맑은 날의 햇볕처럼 환하게 보여주는 경쾌한 대목들도 준비하고 있고.

그래도 시간순 블록 맞추기보다는 이 영화를 보는 과정 자체가 “내가 어느 때부터 눈을 붙였고, 어느 순간에 이게 현실인가 아닌가가 모르겠다.” 같은 꿈 꾸기의 경험과 유사한 쾌락인 것을 부인하지 않는 쪽이 행복하긴 하다. 아주 대놓고 주석처럼 붙어있는 잦은 거울 장면과 CCTV에 대한 ‘시선과 기억’들의 대목은 마치 현대 철학사 문제처럼 탐구욕을 자극하지 않는가? 박해일과 박소담 사이에 있었을 일의 진실과 혼란, 말을 많이 뱉지 않는 사람만이 가진 - 실은 그 이도 명확히 말하지 못할 - 모호함들은 감독이 제안하는 놀이 아닐까. 장률 감독이 [경주]를 기점으로 관람자들에게 자주 내거는 질문이다.

그는 [이리]의 윤진서를 [경주]에 초대하고, [경주]의 박해일을 다시 [군산]에 데리러 가고 [필름시대사랑]의 문소리와 한예리를 각각 [군산]과 [춘몽]에 흩어지고 재회하게 했다. 그리고는 이번엔 [군산]의 박소담을 다음 작품 [후쿠오카]에 소환한다. 로컬의 경계에 구속되지 않고, 영화라는 꿈을 관객과 배우에게 일일이 새기게 한다. 장률이 어느 순간 이 나라 관람객들을 이렇게 매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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