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렉스 trex 2019. 10. 25. 15:22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는 [경계선]을 파트너의 시사회 당첨을 통해 관람할 수 있었다. 여러 영화들이 떠올랐다. 린다 해밀턴과 론 펄먼의 출연한 과거의 TV 시리즈 [미녀와 야수]를 연상케 하는 분장, [언더 더 스킨] 같은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공기, 무엇보다 이 작품의 원작자였던 작가의 전작 [렛 미 인](아시다시피 역시 영화화되었죠)을 연상케 하는 정서들이 강렬했다. 무시하고 건조하게 흐르는 우리의 일상에 틈입한 미지의 존재가 주는 조용한 위협과 비정하게 다뤄지는 생명 하나 둘의 가치. 그에 대한 질문들.

북유럽. 헐리우드산 [밀레니엄] 시리즈가 서슬 퍼렇고 아슬아슬하게 영상 안에 담았던 복지국가의 이면 - 제도를 이용한 강간 -, [경계선]이 작품 안에서 보여주는 아동성애 동영상 성범죄의 요소들을 보면 북유럽을 둘러싼 일련의 사회적 풍경을 간접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약간의 사실과 일부분 이상의 편견에 관한 문제리라 본다. 가령 한국 사회가 자국의 영화산업을 통해 보여주듯, 정작 이곳이 고용한 연변 출신 살인 청부업자들이 활약하는 국가는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아동성애 동영상 범죄의 문제는 북유럽 사회가 아닌, 이제 한국의 문제가 되었다)

[경계선] 등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몇몇 대목에서 북유럽 사회를 묘사하는 스케치들은 그것이 실상이라기 보다는 어떤 그 사회의 근간과 지변을 짐작케 하는 기류로 보인다. 무엇보다 트롤로 대변되는 전설의 환상성은 이 작품 속 배경의 근간이기도 하고, 스산한 호러와 스릴러의 장치를 빌어 작품을 특이하게 장식하는 요소기도 하다. 이런 복잡한 조성을 통해 [경계선]은 한국 제명에 걸맞은 여러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과연 우리는 인간됨과 야생성을 구분할 수 있는지, 정상과 비정상, 이성애 기반 사랑과 교미의 차이, 문명과 야만, 윤리적 행위와 비윤리적 만행, 사회화와 본능 전반의 경계는 정말 단순하게 옳고 그름의 구분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를 묻게 만든다.

언제나 예술의 전제 중 하나가 불편함이라고 가볍게 정의 내릴 수 있다면 [경계선]은 예술의 순간을 느슨하고 가라앉은 러닝타임 동안 내내 촘촘하게 박는다. 벌레를 집어먹는 수컷과 암컷의 생리적 욕구, 성애 영상의 말초적 쾌락과 관심을 애초에 저버리게 만드는 교미, 주류 영화에서 흔히들 금기시하는 유아 훼손 등이 벌어지고 차분하게 경계와 질문을 흐릿하게 만들며 진행한다. 이것은 지적이고 섬세하게 다뤄지기보다는 본능적이고 심지어 서툰 화법으로 진행한다. 아름답다기보다는 기묘하고 나름 최면적인 흡입력을 발휘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이 훔쳐가는 동화와 민담 속 트롤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가 알지 못한 미지의 생명체들의 생물학적 고찰과 설정으로 확장하는 구체성 등은 여러 풍부한 해석과 세계관의 확장 및 상상력을 심어놓는다. 그럼에도 원작자의 문체가 낳는 짙은 쓸쓸함은 딱 전작 [렛 미 인]의 것과 닮았다.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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