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 우드스톡 1999] 락페 타입의 악몽을 회상하기 본문
표면적으론 판데믹 정국이 나름 소강인 시기가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 중 일부는 마스크를 벗었고, 가까운(?) 제주도! 제주도!라는 씩씩한 기세로 항공권을 예약해 휴양을 보내기도 했고, 한 음악인의 ‘흠뻑쇼’라는 이름의 이벤트형 공연에 대해 이런저런 설왕설래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올해는 펜타포트가 무사히 페스티벌을 오픈과 더불어 성대한 마무리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개인적으론 pet shop boys의 무대를 본 감개무량과 행사장 롯데리아 메뉴와 싸구려 순대 맛의 기억이 공존했던 지산은 물론, 귀갓길 걱정에 마지막까지 즐기지 못했던 deftones의 펜타포트 등을 새삼 떠올렸다. 아무튼 올해는 적어도 무사히 여러 사람에게 좋은 기억을 그렇게 새기는구나... 부럽네. 아 물론 한 밴드에 대해선 논외로 하고.
이렇게 중량감 넘치는 락페 하나는 끈적끈적한 절기를 시원하고 후련하게 씻겨주는 정신적 충전을 주기도 하고, 발산과 육체적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다리와 목에 알이 베기기도 하지만. 그런 것조차 도시 생활과는 한결 다른 기분 좋은 후유증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침 넷플릭스에서 론칭한 다큐멘터리 3부작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 우드스톡 1999 | Trainwreck: Woodstock '99》 (이하 《우드스톡 1999》)을 시청하였다. 넷플릭스가 은근히 다큐멘터리 라인업이 쟁쟁한데, 불행하게도 적지 않은 개수가 사이비 종교나 사이버 성범죄로 얼룩진 미국 현대사회와 고개 뻣뻣이 세운 가해자의 존재를 자주 비춰준다. 이중 음악 다큐멘터리 중 하나인 《FYRE : 꿈의 축제에서 악몽의 사기극으로》(이하 《FYRE》>가 나름 물건이다. 드넓은 무인도 안에서 개최되는 음악 페스티벌과 이를 둘러싼 인스타그램 종족류, 셀럽 워너비들의 헛돈 날리기, 참여한다는 공수표만 달린 음악인,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젊고 전도유망한(...) 사기꾼 등 총체적 난국의 결합에 대한 내용이다.
슬프게도 《우드스톡 1999》 역시 《FYRE》 이전에 엄연히 존재했고, 적지 않은 음악팬들의 회고를 통해 멍을 남긴 실패한 락페로서 기록되었다. 나 같은 이들이야 서울 생활 초입엔 WOODSTOCK은 그저 신촌에서 음악 쾅쾅 틀어주는 거 듣고 콜라 마시고 남이 맥주 마시는 거 보면서 “pantera 내한한다는데 가야지?”, “dream theater 이번에 공연한대“, ‘또 오냐?” 따위의 대화를 나눈 곳 정도였지만, 대중음악의 역사는 1969년 8월 장장 4일간 Woodstock Music & Art Fair이라는 타이틀로 벌어진 일로 우드스톡을 언급하기 마련이다. 베트남에 수많은 젊은이를 보낸 사회에 대한 반발로 히피 문화와 플라워 무브먼트의 반향이 어떻니 하는 언급은 인강 강사의 족보 언급 같은 소리일 테고,, 《우드스톡 1999》은 당시 30년이 지난 시전에서 ’다시 WOODSTOCK의 재림‘을 자처한 그 페스티벌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부제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하겠지만,, 그 3일간 벌어진 일들과 반향은 썩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다고 하니 아무튼 유감이다.
사랑과 평화, 음악의 메시지를 건 우드스톡이 1990년대 와서 성공적인 부활을 실현하지 못하고 역사의 누를 남긴 것은 어찌하여?(그리고 알다시피 우드스톡의 이름을 건 21세기의 새로운 페스티벌은 탄생하지도 못했고...) 여러 요인들이 당연히 있겠으나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들의 정리에 의하면 1969년 오리지널을 비롯 잠시 반작했던 페스티벌 기획들이 성대한 규모와는 달리 수익성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것과 함께 원 기획자인 Michale Lang을 비롯 여러 관여한 인물들이 식음료 반입 통제, 머천다이징 업체 선별, 극도로 제한적인 휴양 시설 구비로 황량하고 불편한 페스티벌 환경을 조성한 탓이었다. ‘평화 순찰대’라는 허울만 좋은 그린 티셔츠 차림의 자원봉사자들이 공연장 곳곳에 있었지만, 후에 일어날 무대와 스탠딩 구역의 구분 없는 폭동 사태 때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3일간의 페스티벌 시기 동안 벌어진 여성 관객을 대상으로 한 강간 등을 비롯한 여러 민사 같은 불행한 일들은 어쩌면 피할 수 없었을 일일지도...
뉴욕주 소재 ROME시 전 그린피스 공군기지 부지를 활용한 장대한 규모는 그들의 자신감이었겠으나 40도에 달하는 폭염과 위생 시설의 절대 부족과 제약 등은 당시 방문한 음악팬들 속에 불만의 불씨를 태웠던 모양이다. 거장 james brown이 노래하는 섹스 머신의 쾌락은 진작에 희석되었고, 도심 외곽 지역에서 해방되었던 청춘들의 용광로는 부글대는 발산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이틀간 심야에서 진행된 레이브 파티를 통해 영국에서 온 빅 비트의 선두주자, chemical brothers, fat boy slim의 음악과 엑스타시의 사이키델릭한 도취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 사이에도 자신들의 플레이를 안정되게 보장받지 못한 음악인들은 아수라장이 된 관람 환경을 그저 바라만 보다 그저 자신들의 모국으로 돌아가기 비빴고, 그저 공연 계약금을 잘 챙긴 james brown 같은 경우는 역시 경험치와 경험이 만사형통이라는 감탄을 할 수밖에..
기타 하나 들고 컨트리 포크 넘버를 부른 Sheryl Crow에게 “상체를 벗고 가슴이나 보여라”라고 연호한 객석이나 어떻게든 우드스톡의 정신을 상기시킨다는 의미로 미국 국가를 일렉 기타로 연주한 Wyclef jean의 두 대를 향해 무수한 쓰레기를 투척하는 장면은 가히 초현실적인 광경이다. 오리지널 우드스톡을 통해 한편으론 블랙 아메리칸들의 연대와 음악적 결합이라는 자료 화면을 남긴 것을 새삼 생각하면 더욱 탄식이 나오는 대목.(Wyclef jean은 결국 그 일렉 기타를 내리치며 박살내기에 이른다)이 지나치게 과잉된 남성 청년문화를 극적으로 발산시킨 것은 korn의 무대와 limp bizkit, kid rock 등 일군의 누 메탈 음악이었다.(어떻게 보면.(어떻게 보면 korn 자신들이 주도해 orgy, rammstein 등을 끌어들인 family value 공연의 성격과도 유사해 보인다.)
이들의 공연은 MTV로 대표되는 음악 비즈니스와 nsync 등의 아이돌 음악에 대해 부글부글 거부감을 가진 소위 ‘락빠’들의 뇌관을 건드려 퍼엉- 터트린다. 확실히 더블 음반으로 발매한 우드스톡1999의1999 실황에서 첫 곡에 자리한 korn의 「blind」가 가진 매력은 지금도 인정하지만, 당시 Willie Nelson이나 bush 같은 밴드들의 라이브 무대를 통한 성취는 상대적으로 언급이 잘되지 않아 새삼 안타깝다. 이런 상대적인 언급을 한들 이젠 고인이 된 DMX의 무대가 다신 재현될 수 없을 것이고, 역사엔 만약이란 것도 없고, 지금의 표현을 빌어 멀티버스와 루프물의 기적을 빌어 마지막 특별 무대에 올랐을지도 모를 루머 속의 prince나 guns n roses 등을 소환시킬 순 없다. 그저 역사적 기정사실은 이 페스티벌의 마지막 33일 차는 그동안 누적된 불만을 품고 있었던 객석의 팬들이 일순 폭도로 변모해 펜스와 객석을 구분했던 장벽을 하나둘 무너뜨리고 장작 삼아 활활 불태웠다는 것이다.
매장의 시설들을 털고, 설치된 ATM기의 금액을 빼내기 위해 온갖 도구를 사용하던 이들은 바로 폭도로 규정되었고, 주 경찰의 주도로 진압되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현대 대중문화 역사의 가장 거대했던 락 페스티벌은 90년대에 와서 가장 실패한 음악축제의 대표 격으로 이렇게 참혹하게 기억되고야 말았다.(이 상처 입은 위상의 입지를 대신한 것은 아마도 coachella 같은 요즘의 락페들이 아닐까 싶다.)
추신 - 우드스톡 페스티벌 기획자인 Michale Lang은 이 다큐멘터리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2022년 1월 8일 타계하였다. 미적지근한 유감의 입장을 밝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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