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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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9화

trex 2011. 5. 24. 11:52

20회라는 턱에서 넘어갈랑말랑하는 [노래 한 곡과 A4지 한 장]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기획.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입니다. 이 시리즈는 한 사람의 청소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음악 편력기를 통해, 취향이 한 인간의 성장과 사고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 아닌 그냥 글을 써서 흔적을 남기는 성질머리의 한 예시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연재물을 통하여 이문세, 뉴키즈온더블럭, 건즈앤로지스, 신해철, 마를린 맨슨, 툴 등의 다양한 뮤지션들을 알차게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적기엔 너무나도 죄송할 뿐입니다. 아무튼 시작합니다.

+ 음악취향.Y 게재 : http://cafe.naver.com/musicy/13769

[지금까지의 줄거리] 고2가 되어 드디어(?) 락/메탈 계열의 초보 코스를 밟습니다. 건즈 앤 로지스, 스키드 로우, 본 조비, 메탈리카, 익스트림 등등. 그 와중에 에어서플라이 베스트반 같은 것도 샀지만...


락/메탈 앨범들의 조용한 타격들이 내 취향의 변화를 조금씩 유도하기 전후였다. 이미 세상은 91년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너바나(Nirvana)의 등장이 어떤 일들을 야기했는지는 이쪽 역사를 꿰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리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씬이 달라졌고, 락 매거진 표지가 달라졌고, 패션이 달라졌고, 팬층이 달라졌고... 하지만 너바나를 위시한 얼터너티브의 조류가 날 바꾸진 못했다. 락이라는 음악 자체를 1년 뒤에서야 접했는데, 그 첫 단추가 너바나류가 아니라 건즈 앤 로지스, 스키드 로우, 머틀리 크루 베스트반 이런 식이었던 탓이 컸다. 너바나를 발견하기 전에 다른 쪽이 시야를 가린 탓이다.(결과적으로 그 운명[?]에 대해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같은 해에 나왔던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가 내겐 더 좋았었다. 이 역시도 내가 처음 구매한 마이클 잭슨 앨범이었다. 원래 집에는 어떤 이유에선지 부모님이 구매했던 [Thriller] LP가 있었긴 했지만, 내가 듣고 즐긴 목록은 아니었다. 턴테이블에는 내 돈으로 구매했던 [고스트 버스터즈] O.S.T가 더 자주 플레이되곤 했고, 마이클 잭슨은 그때까지는 '먼발치에 존재하는 +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퀸시 존스와의 결별 이후 앨범이라 그의 매니아들에겐 조금 다른 인상의 앨범이었겠지만, 내겐 최초이자 최고의 앨범이 되었다. 당시 70분에서 80분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분량의 앨범을 손쉽게 더블 카세트 테이프로 발매하던 분위기 답게 - 아니면 그냥 마이클 잭슨이라서? - 2개의 테이프는 압도적인 팝 앨범이 되었다.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가 나온 91년에 이어 92년은 락/메탈 앨범들이 내게 있었고, 이듬해 93년엔 자넷 잭슨의 [janet.]이 있었다. 스킷 트랙까지 합산하여 총 27곡의 압도적인(?) 분량. 그리고 화려한 외양에 어울리게 좋은 앨범이었다. 이 또한 내가 처음 구매한 자넷 잭슨의 앨범이었다. '니플' 사건을 떠나서 지금도 자넷 잭슨을 지지하는 중요한 계기랄까. 충실하고 튼실한 앨범이 어떤 것이냐를 규정짓게 된 계기였다. 내 마음대로 간혹 [Rhythm Nation 1814], [The Velvet Rope]와 묶어 3부작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92년엔 마키 마크 앤 펑키 번치의 두번째 앨범 [You Gotta Believe]도 구매해 들었으니 여전히 팝/댄스와 락 앨범은 병행해 구매했었다. 힙합이나 흑인 음악에 대한 흐릿한 관심은 점점 사그라드는 듯 했다. '옷 뒤집어입기 패션'으로 유명해졌던 크리스 크로스(Kris Kross)의 앨범 같은 것도 구매했으나 안 맞았으니 뭐 관심이 복원되기엔 취향이 아니었던걸까. 사실 그런 패턴이야 지금도 이어져오는 셈이고... 그냥 내 구매 패턴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좁은 취향/좁은 지지라고 해야겠다.

 

한편, 내 취향을 물들인 '락리스너' 급우애와도 미묘해졌다. 사이가 나빠진게 아니라 이제 점차 내가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며 듣고 싶은걸 사는걸, 멀리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위치가 된 셈이다. 이제 더이상 뭘 들어보는게 어떻겠냐 조언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 녀석이 구매하지 않았던 포이즌의 [Native Tongue] 같은걸 사서 들었다. LA 메탈류가 슬슬 사장이 되어가는 마당에, 밴드 자체도 분위기가 변하던 묘한 시점이었는데 이런걸 겁도 안 내고 잘도 사들었다. 급우애는 급우애대로 오지 오스본의 [Live & Loud]나 주다스 프리스트의 앨범들을 사들으며 고고한 락/메탈 선배님의 길을 걸어갔다. 급우애가 날 가장 기특하게(...ㅎㅎ) 여겼던 대목은 내가 워너뮤직코리아를 통해 발매되었던 판테라의 앨범을 샀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앨범이 참 더럽게 웃긴 목록이었다. 앨범 제목이 말이 좋아 [
Vulgar Display of Power]였지만, 실은 전작 [Cowboys from Hell]과의 한장짜리 합본이었고, '한국 한정 특별'이라는 이야긴 헛소리였을 뿐 그냥 심의에 통과된 트랙만 꾸역꾸역 담은 '억지로 꼬맨 앨범'이었던 것이다. 훗날 몇년 후 외국의 매니아들이 그 희귀성(...)을 비웃으며 이 앨범을 역으로 구하려 노력했다는 씁쓸한 일화도 있다. 이 앨범만큼은 내가 역으로 급우 녀석에게 녹음된 물건을 들려줬는데, 그 반응이 참으로 잔인하였다. "메탈리카 짭이구만." 지금에서야 판테라가 메탈리카 짭이다라는 이야길 했다간 게시판에서 콩가루가 나노마이트 단위가 되도록 까이고 뭉개지겠지만, 그때는 그런 말도 통했던 희희낙낙 락 잘난이들 시대였다. [110523]

[10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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