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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xism : 렉시즘
시작은 김천 시외버스정류장 내 이발소였다. 아직도 정식 명칭을 알 수 없는 이발 도구 ‘바리깡’에 의해 단돈 3000원, 10분 내에 까슬한 머리카락이 시원하게 밀리던 내 고등학생 시절의 머리통이었다. 그날 타율야간학습이 있어 저녁을 가락국수 면발로 떼운 후 이발소에 들른 것인지, 그냥 타율야간학습을 빼먹고 일치감치 정류장 이발소에 들른 것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찜찜한 하얀 면도크림이 목덜미에 몇 개의 거품을 묻힌 것엔 아랑곳않고 멍하니 보던 TV 속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는 아직 기억이 난다. 잠수함, 우주로 뻗어가다.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이하 나디아)는 나에게 첫 ‘가이낙스’였다. 훗날 게임 잡지에서 다이제스트로 스토리를 감상한 [톱을 노려라! : 건버스터], 애니 전문지들이 ..
그러니까 문제는 [파]의 마지막이 안겨준 벅찬 기운과 공명하던 충만한 기분을 단박에 [Q]의 서두로 '붉은 바다' 찬물을 좍 끼얹는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시 신 극장판을 만들었는지 그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마지막 4편도 봐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관람했다면 제법 아득하고 착잡한 기분이 들었을, 단편 [거신병 도쿄에 나타나다]를 동반 관람도 못한 한국 관객의 불리함은 다음에도 여전할텐데 말이다! 아무튼 본인들은 고통스럽겠지만, 세계는 손쉽게 재부팅되고 어느샌가 재생하고 또다시 같은 순환이 반복된다. 아이들은 투덜거리고 절규하고 울고 되묻고 그리고 다시 에바에 탑승한다. 우리도 반복하고 있다. 상영관 바깥에서 토론하고 장난감을 구매하고, 아... 다음에 이런 식으로 또다른 장사..
토니 스타크는 스티브 잡스형 행보를 걸어오다 적을 많이 만들어온 모양이다. 2편에선 아버지의 과거 탓이었지만, 이번엔 자신의 업보가 목을 죈다. 게다가 중간엔 치타우리 종족들이 웜홀을 뚫고 뉴욕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이 토니에겐 대단한 국면 전환이었던 모양이다. 자신감 넘치던 천재형 인물이 언제나 정복과 탐구의 대상이던 우주를 실제로 눈으로 목도했을 때의 아득함, 인간적 한계의 체감 등이 그의 어깨에 내려 앉은 모양이다. 즉 어벤져스 이후의 세계관을 부정하지도 않으면서도 현실의 감각으로 다음 어벤져스 이야기를 위한 흐름을 지탱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핀치에 몰린 인간적인 3편의 토니는 그럼에도 애써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전반적인 연출의 톤이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토니의 캐릭터에..
[트론]이야 리메이크작이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오블리비언]을 보니 이런 주제를 좋아하는 감독이었던가 싶다. 정돈된 세계, 상승의 욕구로 매혹하는 획일화의 상층부. 하지만 그 상층부를 붕괴시켜야 진정한 '해방'이 다가온다! 거기에 음악 넣는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래도 기기들 디자인은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보면 [더 문]처럼 폭이 작아 보이는 이야기 같기도 하면서도 나름 벅찬 마무리를 향해 가기도 한다. 그런데 집중력 면에서 탁월했던 [더 문]에 비해, 블럭버스터라는 외양으로 자신을 뽐내야 하는 [오블리비언]은 군데군데 덜컹거리고 조금 어리숙하게 굴기도 한다. 아무튼 속으로는 좀 아쉽고, 바깥으로는 예쁜 영화.
타란티노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숙고나 문제의식 보다는 그저 한바탕 몰살시킬 '백인 쓰레기놈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덕분에 은근히 얄팍한 이 영화 안에서 홀로 인간적인 고뇌로 인삼껌 씹는 표정의 크리스토프 왈츠가 유독 빛나 보인다. 그가 퇴장하는 시점부터 시작하는 총격씬은 "오! 서부 버전 [킬빌]이 시작되는구나!"라는 탄성을 낳게 하지만, 웬걸 이내 마무리된다. 그리고 덧붙이는 이야기는 새로운 구도의 'vs'다, 이러나저러나 타란티노는 철저하게 복수의 쾌감에 헌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은 의도적으로 투박하고, 몇몇 장면은 절제되었고, 몇몇 장면은 노골적으로 아릅답다. 무엇보다 재밌고, 캐스팅엔 불만이 생기지 않는다. 심지어 옛 장고와 대화를 하는 장면은 뭉클하기까지.
애국심도 아니고, 개인의 모랄을 초월하여 그저 한가지 일에 천착하여 성취를 이루는 프로페셔널들의 세계. 폭탄 제거반에 이어 이젠 첩보다. 지독한 일중독을 앓고 나면 남는 것은 적막과 공허함, 그리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다른 목표를 상정하고 탐식할 것이다. 모래알이 아작아작 씹히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거나, 그곳에서 출발해 귀국하거나, 게다가 그게 그렇게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개인을 비추면서도 [허트로커]에 비해선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이는 면들이 있기는 하다. 영화 도입부의 9.11 당시 통화 녹음들이나 (막상 보니 별 논쟁이기나 싶은)고문 장면, 오바마 등이 정치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지만 감독이 주목한 것은 국가의 개인 및 조직의 개인인 듯 하다. 그것도 안 지겨운 편집과 훌륭한 사운..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언제부턴가 뭔가 호사스러운 구경거리가 되었다. 야누스 카민스키의 카메라, 존 윌리엄스의 음악, 그리고 [링컨] 같은 작품에서는 주조연 가릴거 없이 성심을 다해 펼치는 호연까지 가세하니 말이다. [링컨]에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주름과 눈빛으로도 한 사람 인생의 드라마를 짐작케 만든다. 그가 묘사한 링컨은 인자하면서도, 끝간데없이 개혁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팍팍한 노인네 그 자체다. 멍든 가족사를 짊어진 가장, 이야기 인용을 자주 하는 피곤한 상사, 현명하고 교활한 정치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괄한 걸음걸이 묘사엔 한 인간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아우라를 형성한다. 참으로도 엄숙한 연기이며, 작품 자체가 엄숙하다. 침대에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마른 몸을 누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