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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xism : 렉시즘
- 스필버그가 영화 못 만들까봐 걱정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니... - 블럭버스터 팬들의 눈은 필요 이상으로 높아져서 웬만해선 스크린 안에서 경천동지할 광경이 나오지 않으면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비쥬얼 쇼크를 앞세우는 트레일러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라 더욱 그렇고. 류와 트레이시, 춘리, 헬로키티, 마스터 치프 등이 바글바글거리는 광경 안에서도 그렇게까지 흥분감을 느끼기 힘들어 이렇게 무뎌지는가 싶었다. 그래도 지축을 흔드는 티-렉스의 발과 초록빛 반투명 천장 밑을 주행하는 드로이언을 보며 포효하는 콩을 보며 흥분감을 잠재우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 사실상 스토리는 시놉시스만 들어도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눈에 보이는 구성이라, 짧지 않은 런닝타밍 동안에 스필버그 작품 특유의 어떤 느긋함..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본 것은 처음인데, 조명만큼은 대단했다. 감독 본인이 맡았다는 카메라부터 이미 '나는 예술적인 감으로 눌러줄테니 각오하라'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작품이었지만, 시릴역을 맡은 레슬리 맨빌과 주인공 비키 크리엡스가 나에겐 좋았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은퇴를 하거나 말거나... 그것을 번복하거나 이미 여성 캐릭터들이 눌리기 쉬운 시대를 안 눌린 상태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나 좋았다. 무엇보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에 경탄이 나왔다. 아하 폴 토마스 앤더슨씨 여태까지 이런 영화 찍으셨구나. 제가 몰랐네요. 되게 난삽하고 간략히 축소시키면, 사랑의 두가지 표정이라고 정리해도 될 이야기를 이처럼 함의있는 볼거리로 만들었다니-.
도심 대로를 저벅저벅 걸으며, 대파된 환경 위에 우뚝 선 크리처를 들고 있는 유조선을 휘둘러 가격하는 로봇. 이런 경천동지할 화면을 스크린으로 보여준 길예르모 델 토로의 1편의 수훈은 명확하였다. 하지만 뻣뻣한 등장인물들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즐거운 관람으로 기억하진 않았다. 2편도 내가 확 끌어 안을 수 있는 로망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괴수 영화의 본산의 일본의 도시를 거리낌없이 박살내고 보다 가벼워진 몸짓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선대보다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로봇들은 개선의 여지를 보여주었다. 뻣뻣한 1편의 등장인물들 유전자를 혼자서 이식한 듯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아들 외엔 이제 조금씩 자신들의 이야기와 팀웍을 보유하였고, 중국 자본 눈치 보느라 스토리를 꼬아댈 수 밖에 없었던 여건 안에서도 제작진들도 나름..
그러니까 난 처음 알았다. 토냐 하딩이 직접 무릎을 박살낸게 아니었구나. 적어도 영화는 조금 더 토냐 하딩 쪽에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낸시 캐리건의 무릎이 의당 박살났어야 했다라는 말이 당연히 아니고...) 즉 이 문제는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에서 야기된 파국이 아니라, 그냥 토냐 하딩의 여정이 그랬고 주변이 그랬듯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가급적 연출은 토냐 하딩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아메리칸 드림 - 존재나 했을지 모를 그 표상 - 의 붕괴와 일그러짐을 표현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듯하다. 작품 내내 흐르는 팝 넘버들과 코닥의 힘을 빌린 특유의 입자가 돋보이는 화면, 무엇보다 서로를 향해 자행되는 폭행은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 꼬여드는 바보들과 살코기 주변을 맴도는 하이에나들, 가..
조 라이트와는 궁함이 되게 안 맞는 모양이다. [어톤먼트] 당시에는 초반과 후반 사이의 중반 어느 대목에서 아주 깊은 수면을 취했고, 이번에는 어떻게든 참아보고자했던 얕은 수면 상태를 지속했다. [덩케르크]의 프리퀄 같은 이야기를 보면서, 품위와 명분 사이 다혈질의 비균질 총리가 자아내는 이 액티브한 이야기를 왜 잘 견디질 못한 것일까. 게리 올드먼은 훌룡했지만 시상식 친화적인 연기 톤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닿지는 못했다. 게다가 입체적으로 비춰질 이야길 끓는 영국의 자긍심과 결합의 결말로 봉합하니 자국민이 느낄 온도와 이쪽 나라 관객이 느낄 온도는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지하에서 지면 인쇄가 돌아가고 그 진동이 지면을 쓰는 데스크를 흔든다. 효과적인 연출이다. 직업적 자긍심과 최대한 누그러져 표현하려는 애국심의 고양, 긴장감의 이완, 스필버그가 이번에도 잘해낸다. 다만 이야기의 초반이 톰 행크스에 몰려있다. 실화의 사정을 모르는 나는 관객으로서 처음부터 남녀가 충돌하는 서사인줄 알았는데, 메릴 스트립이 변화하고 굳어가며 단단해져가는 과정을 그렸구나 싶다. 그리고 이 변화한 여성의 아우라가 주변의 젊은 여성들조차 고무시키는 자연스러운 연출이 페미니즘 텍스로로서의 더 포스트를 보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듯하다. 일 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프로페셔널들이 자기 몫을 단단하게 해내는 일의 서사를 좋아한다. 더 포스트에도 그런게 있다. 그리고 그 결말부가 마치 히어..
말하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조디 포스터의 [넬]로 충분히 그 신비함와 타자화에 대한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던가. 숲의 여신 이야기 대신 수음하는 독신 여성이 발현하는 욕망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전속 크리처 휴먼인 더그 존스를 위한 헌사 같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카데미 원로들이 좋아할 영화 같았다. 흑백 고전이 나오는 TV 브라운관, 텅빈 극장 객석, 시종일관 들리는 고전 재즈 팝들, 아카데미 수상작 중 하나인 [아티스트]가 불현듯 떠올랐다. 물론 그 과정엔 절단된 손가락, 다시 붙였다 괴사한 손가락, 응징당하며 목에 검붉은 피를 뿌리는 백인 악당이 스쳐 지나가지만. 여기에 상식 같이 행해지는 흑인 차별과 호모포빅, 레드 컴플렉스 등의 시대상이 상징마냥 박혀 동화와 ..
2편의 관람을 위해 바로 전날 넷플릭스에서 1편을 스트리밍해 보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요. 다급함은 있지만 쓸만한 일이었다. 하루만에 패딩턴은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여전히 숙모에게 안부 편지는 잘 보내고 있고(입양된 과거도 밝혀졌다...) 무엇보다 브라운네 가족들은 모두 건강했다. 아이들은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고, 부부 양쪽은 과거 바이크족으로서의 열정을 일상에 무진장 녹인 채로 다르게 바삐 살고 있다. 아 패딩턴은 자석같은 매력으로 이웃들을 만들고 있다. 아이고 따스한 도입부. 더빙 상영을 피해 극장에 오니 자막 상영에도 다양한 나이대와 계층들의 사람들과 함께 했다.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관객들 덕에 즐거움이 배가 된다. 옆 자리 청년은 거북목을 내밀며 이야기에 몰두하고 옆옆 자리 장년은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