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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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17화

trex 2011. 10. 24. 17:12

[노래 한 곡과 A4지 한 장]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기획.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입니다. 이 시리즈는 한 사람의 청소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음악 편력기를 통해, 취향이 한 인간의 성장과 사고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 아닌 그냥 글을 써서 흔적을 남기는 성질머리의 한 예시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연재물을 통하여 이문세, 뉴키즈온더블럭, 건즈앤로지스, 신해철, 마를린 맨슨, 툴 등의 다양한 뮤지션들을 알차게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적기엔 너무나도 죄송할 뿐입니다. 아무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 군대 있는 동안, 그래도 무심하게도 들을만한 좋은 앨범들이 나오곤 했다. 한정된 루트와 시간으로나마 취향을 채웠다.

 

HOT가 데뷔했고, 이어서 젝스키스가 등장했다. TV에서 내무실 사람들이 환영했을리가 만무하다. 대개는 이 군번들은 이수만이 세상에 내놓은 현진영은 견딜 수 있었거나, 아주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HOT는 참 좋아하기 힘들었다. 남성을 보는 시각이 '미필/군필'의 이분법이라는 질풍노도급의 '무식함'으로 무장했던 시기였던 탓이다.(음악도 좋아하기 힘들었다) 보이 그룹 나오던 시절이니 이제 슬슬 걸 그룹 이야기 나오겠네요? 싶겠지만 아직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동안의 시간을 채운 것은 '하늘땅별땅' 같은 노래를 부르던 비비(BB)나 주주클럽 같은 팀들이었다. 주주클럽의 보컬 외모를 둘러싼 내무실 안 논쟁(?)도 있었으나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내무실을 지배하던 취향 중 하나는 음악을 좋아하던 동기가 주도하였다. 듀스를 회고하며 베스트 앨범 [Deux Forever]가 울려퍼졌고, 이현도(D.O)의 첫 앨범과 싱글반 [사랑해]가 2년 연속 재생되었다. 이현도의 첫 앨범 모든 곡을 다 좋아할 순 없었고, '사랑해'는 괜찮았다. 97년이 되니 이현도와 양현석의 만남이라고 '홍보'되었던 지누션의 앨범도 등장하였으니 이 물건도 제법 내무실 베스트급이었다. 'Jinusean Bomb', 'Young Nation' 등은 상당히 좋아했던 쪽이었고, '말해줘'는 끔찍했다. 엄정화는 미묘한 트라우마다. 사단 배치 후 대기하는 내무실 안에서는 몇번이고 엄정화의 '하늘만 허락한 사랑'이 재생되었다. 한심한 트랙이었고, 듣기에도 끔찍한 트랙이었다. 사회에 나와서 엄정화에 대한 '재평가'를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말을 아끼게 된다.

 

굳이 나누자면 흑인 음악 쪽이 강세였던 내무실이었지만, 작은 반란도 있었다. 내가 사회에서 사들고 온 메탈리카의 'Fuel'([ReLoad]) 등도 그랬지만, 옆옆 내무반엔 부산 고참이 판테라의 [The Great Southern Trendkill]를 들고 온 덕에 잘 들을 수 있었다. 그 앨범이 판테라 득의의 앨범은 아니었지만 그게 어딘가. 그리고 무엇보다 크래쉬... [To Be Or Not To Be] CD는 보물 대접을 받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엔 한국의 헤비니스는 크래쉬였고, 크래쉬는 한국의 헤비니스였으니까. 생면 부지의 모르는 사람임에도 안홍찬은 '형님'이었다. 내무실에서 방송실을 통해 정우성의 영화 [비트]를 틀어준 적도 있었는데, '내가 그린 원 안에서'가 삽입되기도 했었다. 아 물론, 내무실 대다수는 헤비니스를 싫어했다.

 

특기 분류 100인가, 1111인가. 암튼 평범한 보병이었다. 즉 그냥 부대 내에 있는 잡초 뽑고, 배수로 삽질하고, 모래 자루 채우고, 사격 연습 나갔다가 성적 나쁘면 똥 나오게 기합받고 그렇게 평범한 보병이었는데 그림을 '내무반에 있는 애들보단 알아볼 수 있게' 그린다는 소문이 나서 잠시 작전 관련 업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별게 아니라 그냥 작전도를 그리는 업무였다. 몸은 고생이 많고(야근이 잦았다), 마음은 편한(아무튼 그림을 그리는게 뙤약볕에서 잡초를 뽑는 것보단 편한 일이었다) 업무였다. 무엇보다 작전도의 대상이 되는 **구 인근 지역에 장교와 함께 자주 외근을 갔는데 H대 교내 식당 같은데서 '사회밥'을 먹거나, 레코드점에 들어가 앨범을 사는 일도 가능했다.(장교에게 말을 꺼내기가 쉽진 않았다) 그 앨범이 바로 이승환의 [Cycle]이었다. 앨범 내용을 떠나서 감개무량이었다. 사실 구매 후 당시엔 감흥이 덜했고 실망한 부분도 있었다. 이 앨범을 좋아하기까지 10년 조금 덜 되는 시간이 걸렸다.

 

97년 늦가을과 겨울 사이, 사단병원에 입원했다. 잘 먹고 잘 눕고 도락하며 TV와 영화잡지 [KINO]를 벗삼아 생활했는데, 역시나 그 부대 인사병에게 부탁해서 넥스트 4집을 사달라고 했다. 앨범 받은 다음날인지 아님 그 전날인지 [영혼기병 라젠카] 첫회를 보고 '솔직한 실망'을 했고, 역시나 앨범 받은 다음날인지 다다음날인지에 MBC의 연예뉴스를 보았다. 넥스트가 해체한단다. 뭐 이러나 모르겠다. 앨범 받고 듣지도 못한 상태인데 (사단병원 병실엔 CD플레이가 가능한 기기가 없었다, 왜 그 앨범은 CD로 간직하고 싶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집에 가도 테이프 밖에 들을 도리가 없는데.) 뭐 어쩌고저쩌고 기자회견을 하고 해체를 한단다. 제법 심난하고 허했는데, 훗날 자대에 복귀해서 들어보니 잘~ 만들었더라. 어떤 로망을 실현한 남자의 흔적이 보였다. 앨범 길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또 그만큼 마음이 허해졌다.


 

사단병원에 있는 동안, SES가 데뷔했다. 철자를 박아놓고 MC가 소개를 해도 굳이 저걸 '섹스'라고 읽는 모자란 놈들은 있더라. 그렇게 읽고 싶었던게지, 그걸 하고 싶어 환장했던게지. 시간이 훌쩍 지났으니 다들 알아서들 명랑하게 잘하며 살고 있으리라. 아무튼 그때부터 세상이 슬슬 또 한번 변하고 있었던거다. 물론 나같이 갑갑한 취향의 사람에겐 재미없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래도 'I'm Your Girl'을 싫어할 순 없었다. 엄정화보다 훨씬 좋았다. 그리고 이듬해 제대가 다가왔다. [111024]

 

18화에 계속 [국내반 이미지 출처 : www.maniadb.co.kr / 사이즈 편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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