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19화 본문
[노래 한 곡과 A4지 한 장]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기획.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입니다. 이 시리즈는 한 사람의 청소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음악 편력기를 통해, 취향이 한 인간의 성장과 사고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 아닌 그냥 글을 써서 흔적을 남기는 성질머리의 한 예시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연재물을 통하여 이문세, 뉴키즈온더블럭, 건즈앤로지스, 신해철, 마를린 맨슨, 툴 등의 다양한 뮤지션들을 알차게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적기엔 너무나도 죄송할 뿐입니다. 아무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 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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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하니 동기들이 복학을 하였다. - 진작에 한 녀석들도 많았지만 - 그중 제일 죽이 맞는 친구가 K군이었다. K군은 영화감독을 꿈꾸는 친구였고, 학교 연극 동아리에서 좋은 연기력으로 내게 인상을 남긴 친구였다. 녀석의 방에는 VHS 수십개와 그의 음악 목록들이 있었다. 녀석과 교환해서 들었던 첫 음악이 자우림이었다. 녀석이 1집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2집을 가지고 있었으니 계약 성립! 구미에서 다시 안동으로 자취 살림을 꾸리기 위해 아버지가 차를 태워주셨을 때 잠시 자우림 2집을 튼 적이 있었다. 차 안은 이내 초상 분위기... 2집을 들은 동기의 반응도 비슷했는데, 그 친구나 나나 몰랐던 것이다. 이후 나올 자우림의 모든 음반들은 1집의 경향도, 2집의 경향 모두 껴안고 있으며 교차하면서 확장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의 자취방에 들어가도 그 사람이 뭘 듣는 것인가를 관찰하는 것은 일종의 버릇이 되었다. 다소 실례가 되지 않는 사이라면 테이프 목록을 뒤적거리며, 음악 이야길 하곤 했다. 나는 나대로 그들을 위한 녹음 테이프 목록을 주며. 그걸 [雲의 앨범]이라는 시리즈로 만들며, 선물로 주곤 했는데 감상평은 그렇게 좋진 않았다 ㅎㅎ. 아무튼 박정현과 이소라는 내 구매 목록은 아니었는데 이때의 기억이 훗날 영향을 끼쳐 역수집의 욕구를 준 모양이었다. 박정현은 노래는 좋은데 앨범은 좋은걸까 의문을 가졌던 대상이었고 - 무엇보다 데뷔반 아닌가 -, 이소라는 무엇보다 3집이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신대철의 곡, 김세황의 기타, 김진표의 랩 등이 엉킨 B사이드는 교란과 혼란 자체였다. 적어도 '작곡과 프로듀싱 능력이 없어도, 목소리 자체가 앨범을 지배할 수 있다'는 개념을 어렴풋이 심은게 아닌가 싶다. 박정현 데뷔반은 동기네 자취방에서, 이소라 3집은 선배형 자취방에서 내내 들었다.
아직도 듀엣 가요 중에서 이승환의 '그들이 사랑하기까지 (duet with 강수지)'를 제일 좋아하는 편이다. 뜻밖의 조합이긴 하지만, 이승환의 앨범 [His Ballad](훗날 [His Ballad 1]이 된)는 좋은 목록이었다. 선곡도 좋았고 - 물론 초판과 재판 목록이 달라지는 부침이 있었지만 - 4집과 5집 등을 구매했음에도 나머지 노래들을 위해 구매할 수 있었다.(그 발라드 넘버들은 선물할 녹음 테이프 목록으로도 유효했다.) 4집과 5집 이후의 이승환은 6집 [The War In Life]에서 5집 당시의 당혹감을 덜어내기 위한 노력을 한 듯 하였다. 하지만 '그대는 모릅니다'를 좋아하기엔 좀 어려움이 있었다. 그보다는 'Rumour' 같은 넘버나, 더 길었음 좋았겠다 싶었던 '나의 영웅' 쪽이 내 취향이었다. 뒤에 현악 터지고 하는 발라드 넘버들보다 락하는 이승환 쪽을 더 좋아했던 시기였나 보다.
콘(Korn)과 마를린 맨슨의 앨범을 구매하며, 슬슬 취향이 굳어가는 듯 했다. 3집 [Follow the Leader]를 구매한 콘은 역으로 1집과 2집을 구매하였고, 맨슨의 [Mechanical Animals]은 당시 음악 잡지 [Sub]의 표지 기사 덕에 구매하였다. [Sub]의 창간호 표지가 커트 코베인이었던가. 그래서 그 호는 구매하지 않았지만, 성문영씨의 글 등이 있었던 그 잡지를 구매하지 않기란 또 힘들었다. 진작부터 [핫뮤직]엔 내가 모르는 기자들이 글을 쓰던 시기여서... [Mechanical Animals]은 전작과는 달랐지만, 전작만큼 근사했다. 나 혼자서 21세기의 데이빗 보위라느니 그딴 소릴 하며 어딘가 글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99년 학술답사를 다녀오는 버스 안에서 시내에 붙은 [매트릭스] 포스터를 보며, 저건 봐야한다고 동기와 의기투합하여 주말에 보고 나왔다. 맨슨의 'Rock is Dead'가 삽입되었던 그 사운드트랙은 당연히 구매하였다. 재탕 넘버들 모음집이었지만 구성은 머릴 잘 썼다. [스폰] 사운드트랙만큼 한동안 달고 살았다. 영화 자체는 2편, 3편 거듭 나오며 똥싸고 말았지만.
99년 2학기였다. 기말 고사 준비 기간이었는데 큰 일이 나고야 말았다. 맨슨의 라이브 앨범 [The Last Tour on Earth], 메탈리카 [S & M], 그 무엇보다 나인 인치 네일즈의 [The Fragile]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었던 것이다. 도서관에 앉아도 좌불안석, 지름신이라는 개념은 일찌기 형성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시험 끝나고 구매하면 되는데, 2주 정도 참는다고 앨범이 절판될 것도 아닌데 그날 밤은 유독 그 앨범들이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기에게 자리 안전을 부탁하고 도서관에서 뛰쳐나가 앨범 3개를 고스란히 구매하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왔다. 왜 그리 기분이 좋던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워크맨으로 테이프를 차례차례 들으며, 정신나간 음악들을 만들어주는 뮤지션에게 뜨거운 고마움을 느꼈다. 메탈리카는 자기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줄 알고 연주를 했고, 트렌트 레즈너는 섬세해졌고 맨슨은 그대로였다. 그래 그렇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잘하는 과목은 A플러스를 맞고, 못하는 과목은 죽을 쑨다. 그렇게 순리대로 99년의 연말이 접혀가고 있었다. [111207]
20화에 계속 [국내반 이미지 출처 : www.maniadb.co.kr / 사이즈 편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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