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xism : 렉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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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20화

trex 2011. 12. 27. 09:24
[노래 한 곡과 A4지 한 장]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기획. [가늘고 짧은 취향 편력기.R] 입니다. 이 시리즈는 한 사람의 청소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음악 편력기를 통해, 취향이 한 인간의 성장과 사고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고찰...이 아닌 그냥 글을 써서 흔적을 남기는 성질머리의 한 예시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 연재물을 통하여 이문세, 뉴키즈온더블럭, 건즈앤로지스, 신해철, 마를린 맨슨, 툴 등의 다양한 뮤지션들을 알차게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적기엔 너무나도 죄송할 뿐입니다. 아무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 복학 후엔 동기와 음반을 빌려듣고, 동시대의 가요를 듣거나 대체로는 미국반 위주로 들었던 듯 하다.



나인 인치 네일즈의 [The Fragile]는 폭도의 음반이 아니라, 차분한 지성의 길을 택한 남자의 변화였다. 물론 거기에도 소음은 있었고, 혼란은 있었으나 트렌트 레즈너는 대체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Starfucker Inc.'는 듣기에 따라선 민망한 시스템 비난이었다. 그럼에도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래도록 들을 수 있는 앨범을 또 하나 추가해줬다는 점이었고, 어쨌거나 음반 그 자체가 선물 같았다. 1999년은 뉴 밀레니엄 어쩌고가 경고등처럼 언론의 단골 메뉴가 되었지만, 왠지 나는 세상이 멸망할거 같진 않았다. 보다 극적인 절멸을 원했는지 모르겠다. 달력 넘어갔다고 세상이 뿅하며 인간들을 리셋할거 같진 않았다.



1999년작하니 하나 더 생각나는 것은 신해철의 또 하나의 밴드 모노크롬(Monocrom)이었다. 일렉트로닉과 넥스트풍 '거창한'락이 교합된 이 음악들이 [Crom's Techno Works]의 뭔가 가다간 만 길보다 나았다. 그렇다. 뭔가 일을 더 벌이거나 팍팍 확장하는게 신해철에겐 어울리는 길이었다. 이 음반 덕에 이자람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훗날 소득이라고 하겠다. 적어도 이 정도면 넥스트라는 밴드가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몇년 뒤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게 될 줄은 이땐 알 도리가 없었잖은가!



12월이 생일이다. 이승환의 [무적전설] 라이브반이 당시 음반으론 3장이었는데, 테이프론 4개짜리였다. 돈없는 불쌍한 렉스. 친구와 후배에게 한개씩 사달라고 했다. 그래서 4개를 맞췄다. 일일이 넌 1을 사다오, 넌 3을 사다오, 요구하고 체크한건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듣고 싶은데 뭔짓인들 못했으랴. 내가 가진 돈으론 모노크롬의 라이브반을 샀다. 사실 [Homemade cookie]반은 라이브 내용물보다 일종의 미공개 트랙(?)의 새 작업 등을 담은 앨범이라 그 내용이 더 궁금했다. '그 들 만의 세상' 같은 3부작 넘버는 지금도 좋아한다. 인지도를 얻은건 '민물장어의 꿈'이지만.(그나마 '일상으로의 초대'만큼의 인기도 없었다.) 그렇게 1999년이 마무리 되었고, 새천년이 열렸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난 다만 여름방학 졸업반이었다.


수업이야 몇 개 없고, 여름이 되자 취업이냐 대학원행이냐를 고민하던 차에 고향으로부터 전화가 한통 걸렸다.


그리고 급한 병을 얻은 아버지는 더욱 황급히 그 해 세상을 떠나셨다.


여름과 가을 사이의 황급한 시간들은 지금도 간혹 고통스럽게 재생해 보는데 - 어머니의 고통엔 비할 바도 아니겠지만 - 아무튼 시행착오가 엄청났다. 기본급도 지급되지 않는 회사에서 영업을 강요당하고 일주일도 안되어 신속하게 퇴사를 하고, 아르바이트 3개로 다음 직장으로의 길을 버티기도 했다. 문장으로 적으면 뭔가 굉장히 간단한데, 그때의 하루하루는 뭐랄까 제대로 엉망이었다. 조금 '안정'이라는걸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겨울 무렵이었다. 이 때의 음악들이 내용물을 떠나 지금도 흔적기관마냥 신체에 남아있다. 눈 내린 서대문구, 마을버스에 내려 직장으로 채 쓸지도 않은 얼어붙은 눈길을 걸으며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데프톤즈의 [White Pony]가 주는 적막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최강이었다. 적막감이 싫어 쾌락을 택하면 림프 비즈킷의 [Chocolate Starfish and the Hot Dog Flavored Water]가 있었다.



회사 업무를 마치고 지하철로 옮겨가는 서울 반대편 학원행엔 강남역 지하 상가가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강남역 지하에만 레코드샵이 제법 있었다. 그 좁디좁은 매장에서 새로 발매되는 기대작들은 좀더 할인해서 팔기도 했고, 서태지의 솔로 2집 같은 것들은 크게 종이에 붙여서 홍보하곤 했다. 발매 당시 굉장히 많이 씹었던 앨범이기도 했다. 당시에 넷에 이 앨범에 대해 '카피 콘'이라고 적어서 아는 동생과 제대로 빈정 상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이 앨범에 대해 상당한 거리감과 조금의 착잡함 비슷한게 있는데, 아무튼 당시엔 씹으면서도 참 많이 듣기도 했다. 적어도 이런 글을 적으면서 '나 이런거 들은 적 없어'라고 내뺄 수는 없다. 분명히 한 때의 중요한 청취 앨범이었으니까. 데프톤즈의 바닥까지 내려앉은 관능의 감각이나 림프 비즈킷의 사정하는 정액 같은 음악이나 다 중요하였다.



넥스트 시절에 한번도 못 가본 공연 구경을 비트겐슈타인 시절에야 갈 수 있었다. 김세황도 없고, 김영석도 없고, 이수용도 없는 밴드 비트겐슈타인. 사실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강남 학원에서 팬 커뮤니티 대화방에서 채팅(...)질을 잠시 하는데 누가 표를 한다는거다. 나로선 강남에서 양재 교육문화회관(지금은 아마 이름이 바뀐 곳일테다)까지의 거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에도 바쁜 채로 바로 버스를 타고 흐린 12월밤의 도로를 달렸다. 공연을 마치고 나오니 눈이 내렸던가. 이렇게 마무리 짓는게 저 민망한 커버 디자인의 음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나을 듯 하다.


[111226]



21화에 계속 [국내반 이미지 출처 : www.maniadb.co.kr / 사이즈 편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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